시인

[충청매일] 6·25가 발발한지도 어언 7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이제는 전쟁을 직접 몸으로 겪은 세대보다는 겪지 않은 세대가 훨씬 더 많아졌다. 필자 역시 전후세대에 속한다. 필자는 아직은 전쟁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던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래서 전쟁에 대한 많은 두려움을 가지며 성장했다.

필자의 초등학교 저학년 때만해도 군인들이 운동장에 수류탄을 비롯한 여러 가지 폭탄 모형을 전시해 놓고 그 위험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폭탄을 발견하면 절대로 건드리지 말고 반드시 가까운 경찰관서나 군부대에 신고하라고 교육을 하곤 했다. 휴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전쟁의 격전지였던 필자의 고향에는 불발탄을 함부로 만지다가 폭발사고로 인명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곤 했다.

6학년 소풍을 가던 때로 기억한다. 그때 우리 학교는 주변의 문화유적이 그리는 많지 않아서 가 본 곳을 다시 가는 등으로 소풍지를 정하는 것이 어려웠던 지라 학교에서는 소풍지로 좀 위험하기 하지만 인근의 산으로 정했다. 그곳은 6·25의 격전지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었고, 전쟁 때 남아 있던 불발탄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는 선생님들의 안내를 받으며 조금은 긴장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소풍을 중간에 멈추고 되돌아 와야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바로 불발탄을 발견한 것이다. 폭탄을 발견하고 선생님의 지시로 우리는 신나던 소풍을 중간에 멈춰야 했다. 다행히 우리는 아무 사고 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선생님들은 불발탄을 경찰관서에 신고했다.

그런데 필자의 기억에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는 또 하나의 참혹한 사건은 그 이전에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때 우리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재미나게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놀고 있던 다른 친구에게 황급히 다가와 ‘네 동생이 죽었다’고 다급하게 외치는 거였다. 이 믿기 힘든 소식을 들은 우리는 친구네 집으로 함께 달려갔다. 친구네 집은 초등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 했지만 우리는 어떻게 달려갔는지 모르게 단숨에 달려갔다, 친구네 집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우리는 보았다. 아 참혹한 광경! 골목길 바닥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고, 벽 여기저기에도 핏자국이 선명했다. 그리고 고통스런 울음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친구의 어머니가 죽은 친구 동생의 시신을 끌어안고 우는 통곡소리였다. 그때 친구네 집은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다른 것으로 바꾸려는 작업을 하고 있던 때였다. 전쟁 때 날아온 폭탄이 초가지붕에 박혀 불발탄으로 몇 년을 박혀서 그대로 있다가 초가지붕을 걷어내는 바람에 밑으로 떨어졌고 골목길에서 천진하게 놀고 있던 친구의 동생이 불발탄이 폭발하면서 그런 끔찍한 참화를 입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몇 해 전 필자는 초등학교 동창회 때 그 친구를 만났다. 그렇지만 친구의 동생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운동장에서 같이 놀던 다른 친구도 동창회에 나와 있었다. 그 친구들도 동생을 잃은 친구에게 그 이야기는 차마 꺼내지 못했다. 흥건한 피와 골목을 메우던 통곡소리는 우리들에게는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아픔으로 남을 것이다.

6·25가 휴전된 지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남북의 대치상태는 계속되고 있고 전쟁의 아픔 역시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