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충청매일] 얼마 전 모 잡지에서 집 안에 물건을 잔뜩 쌓아놓고 버리지 못하는 노숙자 부부를 소개했다. 동네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사용해도 괜찮아 보이는 물건을 주워와 집을 가득 채웠다. 전기밥솥, TV, 선풍기, 침대, 옷, 신발, 샴푸, 비누 등 온갖 생활용품이 다 있었다. 이미 가지고 있지만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버리지 못하고 원룸을 가득 채웠다. 원룸에는 부부가 생활하는 이불 깔린 공간 이외에는 앉거나 움직일 공간이 없다.

임상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저장강박 혹은 저장장애(DSM-5)라고 한다. 미국에서는 이와 같은 저장장애를 가진 비율은 전체 인구의 2~6%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이와 관련한 통계가 없다고 한다.

필자도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 사무실에는 개봉하지 않은 신문, 주간지, 잡지 등이 한 켠에 쌓여있다. 오래 된 문서도 혹시나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버리지 못하고 있다. 1년 이상 한 번도 보지 않은 책들도 많다.

심리 전문가는 이러한 행동의 밑바닥에는 ‘불안’이 깔려 있다고 한다. ‘물건을 버렸는데, 나중에 필요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증세 때문이라고 한다. 필자가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데도 아까움, 절약 보다는 이 불안함이 더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버리지 못하고 쌍아 두는 것에는 눈에 보이는 물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께 세미나 발표에서 말이 꼬여서 버벅거렸던 기억, 기분이 상했지만 대응하지 못하고 참았던 아내의 말 한마디, 기분 나쁜 직장 동료의 말과 행동들. 더 오래는 어린 시절 아픈 상처들도 버리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이러한 기억들은 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 쌓아 두는 물건들과는 다르다. 버리고 싶어도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기억의 찌꺼기들이 많이 남아 있을수록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

집이든 마음이든 쓰레기가 쌓이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잘 버리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는 어렵다. 그래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해서라도 버리고 나면 삶이 가벼워지고 행복해진다. 집에 쌓인 물건은 한번만 버리면 되지만, 마음에 쌓인 찌꺼기는 지나간 시간에 비례해서 오래, 여러 번 비워야 한다. 비우는 과정은 많이 힘들지만 그 열매는 너무 달고 오묘하다. 그런데, 어떤 기억은 버리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잊혀지지 않는 것도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실 과거의 상처는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아픈 상처가 아닌 다른 것으로 바꿔 생각하는 것이 방법이다. 과거의 사건은 바꿀 수 없지만 그 기억을 어떻게 추억하는지는 내가 선택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아픈 기억을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감사함’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상처 때문에 더 이상 힘들지 않을 수 있다. 며칠 전 내린 비를 우울하게 생각하느냐 가뭄 해갈에 도움이 되었다고 감사하게 생각하느냐는 전적으로 내게 달려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혹자는 ‘지금 이 상황이 감사하지 않은데 어떻게 하느냐?’라고 반문할 수 도 있다. 지금이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과거의 상처에 감사할 수 있겠는가? 뜬 구름처럼 생각될 수 있겠으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금, 여기에 충실하게 살자’이다. 선 경험자로서 과거의 나를 버려야 새로운 내가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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