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생명의 용트림이 시작 되었다. 바람 끝이 따스하다. 떠나기 싫어 머뭇거리는 겨울의 끝자락을 몰아내고 메마른 대지위로 햇살 한 줌씩 스며들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온 산야에 윤기가 돌기 시작한다. 가만가만 내리는 봄비로 수혈 받은 가지들마다 검푸른 수피를 뚫고 잎눈이 열리고 꽃망울이 벙그느라 시끌벅적하다.

입술을 앙다문 채 모진 겨울을 견뎌낸 잎눈 꽃눈들이 봄의 전령사의 부름에 응답하며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척박한 땅, 돌 자갈 틈새에 떨어진 씨앗들까지 무거운 흙덩이를 들치고 여린 싹을 밀어 올리느라 분주하다. 생명의 발아, 축제의 장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생명의 근원은 어디일까. 씨앗이다. 씨앗은 지난 어느 시접에서인가 발아(發芽)를 통해 태어난 한 생명이 소임을 다하고 생을 마감하면서 그의 삶의 결정체를 응집하여 다음 생을 위해 남겨놓은 위대한 산물이다. 씨앗들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물, 산소 햇살을 공급받아 발아(發芽)하고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며 성장해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가며 분신을 남긴다. 끝없는 윤회를 거듭하며 생명의 근원이 지속 될 수 있도록 소임을 감당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발아(發芽)라는 위대한 과정을 통해 태어난다.

씨앗의 발아(發芽)를 눈여겨 본 적이 있는가. 인간 생명유지의 기본이 되는 벼꽃을 눈여겨 본 적이 있는가. 볍씨하나가 발아하여 하늘의 은총을 힘입어 푸르게 자라고 때가 되면 이삭이 패고 꽃을 피운다. 하도 보잘 것 없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꽃인지 티끌인지조차 알 수 없는 꽃이다. 눈여겨 보아주는 이 없는 볼품없는 꽃이 제 꽃가루받이를 통해 생명을 잉태하고 나면 낟알들이 열리고 여물어 사람을 먹여 살린다. 세상에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씨앗을 남기고 씨앗들이 발아하고 자라남으로 먹이사슬이 형성되고 이에 의해 삶이 유지된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다면 세상은 황폐해 질 수박에 없으리라.

봄여름이 가고 가을이 깊어지기 시작하면 쓸데없는 몸살을 앓는다. 이유인즉 봄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는 꽃나무들 때문이다. 내가 걱정할 몫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파트 앞 작은 정원에 있는 목련나무나 철쭉 등에 꽃망울이 적게 맺히면 어떻게 하나 전전긍긍한다. 유난히 꽃망울이 적을 때면 영양이 부족해서 인가 싶어 관리실을 채근해 옆면 시비를 하는 등 억척을 떨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무는 튼실해지고 이듬 해 봄이면 가지마다 탐스런 꽃을 피워낸다. 그럴 때면 내 쓸데없는 오지랖이 나름의 몫을 감당했구나싶어 안도한다. 튼실하게 자라 곱고 실한 꽃을 피워낸 저들을 보며  눅눅한 심령이 꽃으로 피어난다. 생명의 발아가 안겨 주는 환희에 화답이라도 하듯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펴지고 굳게 닫혔던 마음의 빗장이 헐거워지기 시작한다.

생명의 발아는 이에 국한 되지 않는다. 우주가 창조되던 태고의 시점 어디에선가, 창조주의 손길을 통해 생명의 씨앗을 부여받은 누군가로부터 면면이 이어온 씨앗이 어느 날인가 우리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 서로 만나 사랑함으로 생명이 잉태된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또 하나의 우주인 모체는 발아한 씨앗을 키워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몸 안의 진액들을 온전히 내어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발아를 통해 생성된 생명은 하나의 아주 작은 형태에 불과하지만 모체와의 연결고리를 통해 영양분을 섭취하고 숨 쉬며 자라 꽃으로 피어난다.

내 안에 잉태 되었던 작은 씨앗들도 눈부신 발아를 통해 성장하여 꽃으로 피어나 튼실한 나무가 되었다. 그들 안에 내재 되었던 씨앗역시 성스러운 만남을 통해 발아하여 우주 공간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제 몫을 감당하고 있다. 저들 역시 어느 시점에서인가는 사랑하는 이를 만나 짝을 이루어 발아의 사명을 감당할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발아라는 위대한 과정을 되풀이하며 유지 될 것이고 동식물 모두가 유기적인 관계를 이어감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발아를 통해 세상에 온 나의 삶은 어땠는가. 내 안을 돌아보면 수많은 꿈들이 생겨났다 살아졌음을 기억한다. 특별할 것 없는 산골의 어린 여자 아이는 자라면서 늘 외로웠다. 사는 곳이 항상 낯설었고 놀아 줄 친구가 없어 거의 혼자였다.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자주 다녀서인가 고향에 대한 추억도 없다. 이상하게도 시골학교는 인가와 좀 떨어진 곳에 있었고  외딴 터에 있는 학교사택에 살아서인가 친구를 사귀지 못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무렵 아이의 친구가 되어 준 것은 학교 도서관에 있는 각종 문학전집이나 손바닥만 한 라디오가 전부였다. 되는 대로 뜻도 모르면서 책을 읽었다. ‘테스’나 ‘슬픔이여안녕’ 등이 수록된 전집을 읽으며 어린 나이에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작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좋아 숟가락을 입에 대고 말하는 흉내를 내기도  하며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기도 했다.

기억에는 없지만 동생의 말을 들어보면 여학교시절 언젠가 소설을 써가지고 신춘문예 응모작이라며 어느 신문사엔가 보내라는 누나의 말에 등기로 보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어설픈 시도 한 번으로 소설가의 꿈은 그렇게 끝났다.

아나운서가 되겠다던 꿈은 어찌 되었는가.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조금 소질은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네 어린 시절엔 일 년에 몇 번 학교 운동장에서 영화가 상영되곤 했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무렵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엔가 나와 있던 ‘위문편지’라는 글을 낭송해 당시 상영했던 영화에 편집되어 한 동안 그 영화가 상영되는 곳에서 관객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걸 보면.

그 후 중학교에 1학년 국어시간에 친구들 앞에서 책을 읽게 되었는데 말하는 것처럼 책을 읽는다고 친구들이 웃어대는 바람에 큰 상처를 받아 오랫동안 남들 앞에서는 소리 내어 책을 읽지 않았다. 결국 아나운서가 되겠다던 어린 소녀의 꿈은 스러지고 말았다. 내안에 무수한 꿈의 씨앗들이 생겨났지만 의지가 부족해서 제대로 발아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나이 들어가면서 파편처럼 부서진 꿈들이 생각날 때면 순간순간 아팠다.

씨앗의 발아는 거저 되는 것이 아니다. 무거운 흙덩이를 들치고 여린 순이 나오기 위해서는 힘듦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해 언젠가 꽃망울 맺어 봄날에 피어난 고운 꽃들은 삭풍을 견뎌낸 뒤에 비롯된 산물이다.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낸 이들의 뒷면에는 꿈을 여물리어 발아시키기 위한 눈물이 있었음이다. 생명의 발아는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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