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충청매일] 요즘 필자에게 가장 고민되는 화두는 원칙과 융통성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나는 어떤 원칙을 따라 생활하고 있는지? 그 원칙은 바람직한 것인지? 원칙을 지키지 않은 행동에 대해 잘못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어느 정도는 융통성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공유의 비극이라고 불리는 ‘자연환경문제’에 대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엘리너 오스트롬은 그녀의 저서 ‘공유의 비극을 넘어’를 통해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누구의 소유도 아니면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자연환경 자원은 제한된 용량이나 임계치를 초과해 사용할 경우 자연적인 회복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 이것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 자유경쟁체제로 어업을 하는 지역의 경우, 세월이 지나면서 너무 어리거나 산란기간의 물고기까지 잡아버려서 결국에는 인근 바다에서 더 이상 물고기가 잡히지 않게 되는 비극을 맞게 된다. 이것이 공유의 비극의 대표적 사례인데, 엘리너 오스트롬은 이러한 비극을 극복하고 성공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했다. 물고기의 씨가 말라버릴 위기에 처했던 어떤 어촌에서 일정기간 잡을 수 있는 물고기의 양을 정해놓고 어부들끼리 순번을 정해 어업을 하는, 자발적이고 강력한 원칙을 정해서 지속가능한 공동체(인간-인간, 인간-자연)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녀의 저서에서 소개한 성공적인 공동체들의 공통된 특징은 일반적인 시장자본주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하고 독특한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오랜 세월 시행착오를 겪어오면서 스스로 터득한 지혜였고, 이것을 지키지 않는 경우는 그 공동체에서 추방됐다.

반면, 우리는 그 동안 자유롭게 경쟁하고, 그 경쟁 속에서 서로를 자극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는 구조가 더 바람직하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오히려 이 무한경쟁체제가 결국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미세먼지, 청소년 자살, 소득 양극화와 차별, 농촌 소멸 등의 사회문제도 지나치게 자유경쟁을 강조한 탓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원칙은 지키기 어렵고 불편하며, 때로는 한번쯤 어겨도 될 것 같은 충동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 크고 다시 회복하기도 어렵다.

조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조직 구성원들이 합의해 세운 원칙을 불편하고 어렵다는 이유로 하나 둘씩 어기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원칙의 필요성조차 잊어버린다.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다고 치부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 갈등을 빚기도 하는데, 이 갈등 상황은 또 다시 원칙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이유로 작용한다. 갈등을 겪지 않으려고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원칙을 포기하란 꼴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필요하다고 인정해 합의하면 언제든지 원칙을 변경할 수 있다. 다만, 변경하기 전까지는 기존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회나 조직이 아닌 개인적인 인간관계나 가정에서는 어때야 할까? 개인적인 인간관계, 특히 가정에서는 원칙과 논리보다는 융통성과 수용이 우선해야 한다. 필자는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는 평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치 고지식하고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잘 듣지 않는 완고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자의 아내는 융통성이 없다고 자주 잔소리를 하는데,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평가이니 기분은 나빠도 맞는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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