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충청매일] 요즘은 공동체 전성시대 같다. 마을공동체, 유역공동체, 직장공동체 등 공동체라는 단어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이전에는 어떤 문제나 쟁점에 대해 주로 의사결정 집단과 일부 관계자가 독점적으로 정보를 소유하고 결정했다. 그러다 보니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당사자들은 진행되는 상황을 알지 못하거나, 그들의 실정과 전혀 다른 정책결정의 결과를 ‘당해야’만 했다. 이런 의사결정과정의 ‘정책적 폭력’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모든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의사결정구조로써 거버넌스나 공동체의 필요성이 제기돼 왔고,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 같다.

사실 공동체는 문자로써 표현되지 못했을 뿐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다. 가장 작은 단위로써 가족이 그렇고, 조금 더 크게는 마을이 공동체였다. 그런데 시대와 사회구조가 변하면서 큰 단위의 공동체는 점차 희미해졌고, 작은 단위의 마을공동체마저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마을은 그냥 동네 주민들이 함께 사는 행정적인 공간개념으로 변해 가고 있다.

가정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루 종일 직장생활 하느라 얼굴보기 힘든 부모, 학교와 학원으로 내몰려 피곤에 지친 아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 집이라는 공간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각자의 공간에서 숙제, 게임, 친구들과의 SNS, TV시청으로 또 따로따로이다. 가끔 대화를 할라치면 곧 다툼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대화를 꺼내기가 두렵다. 부모는 자녀들이 사춘기이니까, 자녀들은 아빠, 엄마는 세대차이가 나서 대화가 안 된다고 생각하며 서로를 포기한다.

‘마음이 따뜻한 공동체’를 꿈꿨던 직장에서도 그렇다. 새로운 신청사를 지어 이사했으나 그 안의 것은 예전 것 그대로이다. ‘새 부대에 헌 술’을 담은 꼴이다. 더구나 직원들은 회색 철문으로 닫혀진 각자의 방으로 분리돼 있다. 옆방에 있어도 며칠 동안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다. 소통의 공간으로 휴게실을 만들어 놓았지만 썰렁한 소파와 냉장고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화는 카톡과 메신저가 대신한다. 새로운 공간이 직원들 간에 더 많은 벽을 만들어 버렸다. 가치와 철학이 배제되고 효율성이 강조된 공간설계의 결과이다.

직원회의에서도 이견을 내 놓기가 어렵다. 이견은 마치 불만과 불평으로 치부된다. 수용되지 못한 이견을 제시한 사람들은 대부분 ‘포기’를 하거나 가끔은 다른 방법, 즉 더 ‘강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 과정에서 ‘포기’는 정책에 대한 ‘수용’으로, ‘강한 표현’은 ‘거부’로 치부되기 쉽다. 그래서 그 정책은 대부분 직원들이 동의한 것으로 인정돼 시행돼 버린다. 가정과 직장, 나아가 사회 공동체에서 이견은 반드시 필요하다. 건강한 공동체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이견이 자유롭게 오고가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런 것일까?

필자는 이견이나 갈등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견으로 생기는 갈등관계를 피해가는 방법으로 일반적으로 ‘포기’를 선택한다. 특히 얼굴을 맞대고 논의하는 회의에서는 논쟁이라는 불편한 상황을 꺼려한다. 그래서 적당하게 봉합하거나 포기한다. 하지만 건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 불편한 상황(아프지만 곪은 부위를 끄집어내는 과정)을 거쳐서 갈등이 완전하게 치유된다. 그냥 ‘포기’라는 붕대로 덮어버리면 나중에 더 큰 아픔과 치유할 수 없는 상태가 돼 버린다. 지금 불편하다고 공동체의 미래 가치와 이념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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