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희 수필가

서랍 정리를 하다 요즘 보기 드물게 펜으로 정성 들여 쓴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딸애가 어버이날에 보낸 편지였나 싶어 읽어보니 어느 해 가을 수원에 있는 교도소에서 온 편지였다. 펜으로 쓴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언제이던가. 컴퓨터를 사용하고 인터넷을 생활화하면서는 펜으로 글 쓸 기회가 없었지 싶다.

신문과 잡지에 글을 실으면 가끔 메일이나 전화가 올 때가 있다. 그때마다 감사의 표시로 답글을 보내긴 하는데 교도소에 있는 사람이 보내온 편지는 겁부터 났다. 편지는 내 글을 읽고 감명 깊었다며 글에 대한 느낌과 자신의 감정을 적은 세 장이나 되는 장문이었다.

교도소에서 어떻게 내 주소를 정확히 알았을까. 어느 책에서 보았을까 하는 의문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편지 끝에 꼭 답장을 받아봤으면 좋겠다는 말이 다짐받듯이 몇 번이나 쓰여 있어 무시하기도 쉽지 않았다. 며칠을 혼자 고민하다 남편과 동료에게 살짝 귀띔했다. 하나,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이 답장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런저런 이유로 편지를 서랍에 넣어두고 교도소 주소가 적힌 편지 봉투는 없애 버렸는데, 그때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유로 교도소에서 생활하는지 모르지만, 글의 내용과 표현력으로 봐선 독서량도 많고 문학에 대한 열정도 대단한 사람 같았다.

중학교 때였다. 지금은 사라져버렸지만 내가 학교다니던 때에는 일 년에 한두 번 국군장병에게 위문 편지를 썼다. 요즘은 문자 메시지와 이메일로 바깥세상과의 연락이 자유롭지만, 당시만 해도 군인들의 즐거움은 위문 편지와 위문품을 받는 일이라고 했다.

2학년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답장이 왔다. 대학교를 휴학하고 군대에 갔다는 그 사람은 계급이 하사였다. 편지의 내용이나 글씨체를 봐도 다른 군인들이 보내온 편지와는 사뭇 달랐다. 예의로 한 번 답장해주고 잊어버렸는데, 그 사람한테서 계속 편지가 날아왔다. 집으로 오는 편지이니 부모님께서 알게 되었다. 군에서 오래 근무하셨던 아버지께서 군대에서 편지 받는 일만큼 기쁜 일은 없다며 답장을 해주라고 하셨다.

그 사람과의 편지가 시작되었다. 내가 한 번 보내면 그 사람한테서는 두세 통씩 답장이 왔다. 오빠, 동생처럼 오고 가던 편지가 백여 통이 넘었다. 그사이에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그 사람도 군 생활에 마침표를 찍을 날이 가까워졌다.

제대를 며칠 앞두고 그가 군복 입고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그는 제대하고 학교로 돌아가 공부하겠다고 했고, 나도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예상도 못 한 답장이 다시 날아왔다. 제대 후에도 계속 편지를 하자며 만나고 싶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별일도 아닌데 그땐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이 두려웠다. 얼굴도 안 보고 펜팔 하는 것이 유행이었고 편지로 이어져 결혼한 루쉰처럼 사귀다가 결혼을 하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편지는 인간의 고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시작은 사제 간이었지만 결국은 부부가 되어버린 루쉰과 쉬광핑은 편지가 맺어준 세기의 사람들이다. ‘루쉰의 편지’는 사회운동가였던 그의 제자 쉬광핑과 7년간 주고받은 170여 통의 편지 중 43편의 편지를 엮은 책이다. 유부남이었던 루쉰과 제자 쉬광핑은 소소한 일상과 사회 개혁을 함께 고민하고 교류하다가 연인으로 발전했고 결국은 결혼하게 되었다.

서랍 속에서 꺼낸 편지를 읽어 내려가다 그 사람 생각이 났다. 어떤 마음으로 계속 펜팔하고 만나고 싶어 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살면서 스치듯이 그 사람의 이름이 생각날 때면 빚쟁이 같은 생각도 들었다.

명쾌하지 않은 기억들은 세월이 아무리 감싸 안아도 추억으로 변하지 않는다. 같이 겪은 일도 상대에겐 추억이 되고 나한테는 빚으로 남을 수 있다. 그러니 기억이란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이기적인가. 그런 줄 알면서도 이제 나는 한 명의 이름을 더 기억해야만 할 것 같다.

다시 편지를 읽어본다. 빨간색 볼펜으로 밑줄을 그은 문장에 시선이 머문다. 내 글을 인용하고 밑줄을 그어가며 꼼꼼하게 평을 남겼다. 세상과 단절된 닫힌 공간에서 글을 읽고 편지를 보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10여 년 전 여성 문인협회에서 여자교도소 수용자들과 문학 행사를 하면서 교도소 내의 벽이 그렇게 높은 줄 처음 알았다. 그 높은 담벼락 아래에서 미지의 사람한테 편지를 썼을 그 사람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교도소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던 것이 그 사람에게 인간을 나누는 편견을 심어 준 것은 아니었을지. 그 사람도 쉬운 마음은 아니었을 텐데. 나를 여자로 생각하기 전에 내 글을 대상으로 편지를 보냈을 그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다 지쳐 편지 쓰는 일을 잊어버리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지나고 나면 늘 후회투성이다. 왜 그때의 내 생각과 지금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는 건지. 사회가 만들어준 안경을 쓰고 마음대로 상대를 재단했던 내 마음이 오히려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어쩔 수 없이 이제는 갚을 수 없는 빚이 되었지만, 언제고 다시 마음을 돌려줄 기회가 온다면 기꺼이 편지를 쓸 것이다. 가슴 속에 눅진하게 남아 있는 부채를 상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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