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 충북예술고 교사

1997년 저의 어원사전 출판이 좌절된 후, 다른 학자들이 사전을 출판해주겠지 하고 기대하다가 2010년에 나온 강길운의 ‘비교언어학적 어원사전’에 이르러, 우리의 어원 찾기 작업은 막바지에 이른 듯합니다. 그런데 강길운의 사전을 읽으면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모든 우리말의 기원을 외국어에서 찾으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외국어에서 온 말이면 당연히 외국어에서 찾아야겠지요. 그러다 보니 조금만 낯선 말이면 자꾸 외래어의 흔적으로 보려는 관성이 생기고, 쉽게 추리할 수 있는 우리말이 사전에서 빠진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보완하려고 최근에 다시 어원사전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올해(2018) 나온 서정범의 이 책이 저의 이런 꿈을 또 한 번 꺾었습니다. 이제 저는 어원사전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즐거운(?)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서정범은 경희대 교수를 지내다가 퇴임을 했는데, 2009년에 작고했습니다. 그는 이 책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는 결론입니다. 그의 제자 박재양이 주변의 도움을 얻어서 탈고한 책입니다. 한 책이 스승의 뒤를 이어서 제자의 손에 의해 완성되는 아주 특별한 사례를 이 책에서 봅니다. 그런 스승을 둔다는 것도 행복이고, 그런 제자를 둔다는 것도 행복입니다. 저처럼 거친 광야에서 혼자 작두날 밟고 날뛰는 사람으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사실 학문은 이렇게 연속성을 지닐 때 위대한 업적을 이루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창작이 개인의 천재성에 의존한다면 학문은 연속성에 의존합니다.

서정범은 어원별곡을 비롯하여 학원별곡, 수수께끼 별곡, 이바구 별곡 같이, 1980년대 대학가에서 벌어지던 문화현상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 당시 대학생이었던 저는 서정범의 작업을 매우 좋게 평가했습니다. 대부분 대학가의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던, 지금 세대들이 말하는 ‘아재 개그’를 있는 그대로 모아서 책으로 엮었는데, 어떻게 보면 젊은이들이 장난처럼 내뱉는 말을 책으로 엮는 것이니, 그 당시에는 그런 걸 책으로 엮는다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살 만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대학 교수가 그런 작업을 하고 있으니, 한 번쯤 그런 의심을 살 만합니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난 뒤 지금 보면 그런 작업들이 없었다면 그 당시의 ‘아재개그’는 허공으로 흩어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농담들이 한 시대를 상징하는 언어현상이었다는 것을 이제 와서 알게 된 그 문화를 서정범은 그때 벌써 정확히 인식하고 학문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어원은 그 겨레의 정신을 캐는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이 땅바닥을 파서 새로운 사실들을 찾아내듯이 어원은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인지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철학은 말에서부터 시작해서 말로 끝납니다. 그런 철학의 첫 걸음이 바로 어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에게 어원사전은 너무나 늦게 나온 셈입니다. 이제라도 나왔으니 천만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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