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숙 수필가

한 달 후면 딸이 출산을 한다. 딸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다. 허리를 손으로 받치고 무겁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안쓰럽다. 나의 산모 시절이 요즘 부쩍 떠오르곤 한다.

결혼 일여 년 만에 기다리던 아기가 들어섰다. 만혼인 사위의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빨리 아기를 가지라며 은근히 속을 끓이던 친정아버지의 얼굴이 비로소 환해졌다. 줄줄이 손녀만 보신 시부모님은 은근히 손자를 바라셨다.

시어머니는 입덧도 하지 않는 나를 보고 당신이 아들을 가졌을 때와 같다며 은근히 기대를 품었다. 당시에는 어른들이 산모 배의 생김새를 보며 아들, 딸을 점치곤 했는데 두루뭉술한 모양새가 영락없이 아들이란다. 아기용품도 온통 남자애에게 어울림직한 파란색으로 준비했다. 지금의 산모들은 초음파로 성별을 미리 알 수 있단다. 지난 일이 참 아득한 옛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나는 출산을 계기로 낯선 시집살이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다. 태중의 아기가 커 갈수록 고작 방 두 칸이지만 친정집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김이 모락모락 나던 엄마표 밥만 생각하면 절로 침이 고였다. 하지만 출산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막냇동생의 맹장이 통증을 일으켰다. 나의 친정 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시어머니는 대각미역을 사들였다. 부정 탈까 봐 미역을 꺾지 않고 광에 보관하셨다. 배냇저고리도 손수 만드셨다.

헌데,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딸이 태어났다. 간호사가 공주님입니다 하는데 귀를 의심했다. 순간 아기를 보여 달라고 했다. 야무지게 입을 오므리고 있는 얼굴이, 가냘픈 몸이 눈에 들어왔다. 수고했어, 아가야. 건강하게 태어나주어 고맙다!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출산의 고통을 함께 겪었을 아기가 든든한 동반자처럼 느껴졌다. 그 첫인사는 육아 내내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손녀라는 소리에 시어머니는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셨다. 하긴 당신도 맏딸을 낳고 아기가 들어서지 않자, 씨받이를 들여서라도 대를 이어야 한다는 문중 어른들의 압력에 시달렸단다. 이심전심이 통했으리라.

이거 마시거라. 언제 준비했는지 꿀물이 담긴 병을 내미셨다. 내가 멍하니 앉아 있자 남기지 말고 얼른 다 마시라며 채근하셨다. 울컥, 딸 낳은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산후에 금방 꿀물을 마시면 산후통이 없다는, 시할머니께 배운 속설을 대물림하신 것이었다. 꾀꼬리처럼 말씀 많던 분이 고개만 끄떡끄떡하더니 일찍 집으로 돌아가셨다. 나중에 들으니 당신도 혹시 아기가 바뀐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황하셨단다.

아들을 낳은 옆 침대 산모는 왠지 당당해보였다. 그녀의 남편은 음료수며 빵 등 먹거리를 잔뜩 들고 와 밤새 잔치를 벌였다. 출장 갔다가 달려온 남편은 슬쩍 나를 바라보고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만 남기고 온다간다 소식이 없었다. 딸을 낳아서 그러나 하는 서운함이 밀려왔다. 산모가 울면 좋지 않아요. 간호사가 오가며 말렸지만 에미 된 첫 밤에 나는 주책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의외로 강건하셨다. 당신이 손수 산후조리를 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첫 손주를 본 엄마도 만만치 않았다. 산후조리 할 아주머니를 친정 동네에서 섭외하더니 수고비와 차비까지 부담하셨다. 어려운 살림에 그리하신 게 미안했지만, 뒷배가 든든한 느낌이 들어 으쓱했다. 아주머니는 버스로 한 시간여, 게다가 산꼭대기에 있는 우리 집까지 매일 출퇴근 했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리라.

한여름 초복에 출산한 산모의 방은 불을 때어 쩔쩔 끓었다. 두툼한 솜이불을 들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기는 그 찜통을 견디지 못해 땀띠를 뒤집어썼다. 하지만 시할머니가 전수한 산후조리법은 시댁의 불문율이었다. 막내 시누이가 외국에서는 산모가 출산 후 금방 샤워하고 아이스크림까지 먹는다는데 했다가 혼이 났다. 혹여나 당신이 살피지 못해 잘못될까 전전긍긍하셨다.

아기가 땀띠를 견디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자, 시어머니는 방에서 아기를 데리고 나가 당신이 손수 우유를 타서 먹이셨다. 산모의 몸이 뜨거우니 서로 닿으면 아기의 땀띠가 더 심해진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젖이 잘 나와야 한다며 미역국을 연속으로 내게 들이미셨다. 젖몸살을 앓으며 불안감에 시달렸다.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불분명한 의견에 온 집안이 죽 끓듯 했다. 산후우울증이 무섭게 달려왔다.

아주머니는 쯧쯧 혀를 찼지만, 그저 묵묵히 일만 하셨다. 산꼭대기에 위치한 우리 집은 동네 펌프장의 수압이 낮은 관계로 낮에는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매일 기저귀를 삶아서는 동네 우물까지 가서 빨아왔다. 시어머니 몰래 찬 수건을 대고 마사지를 해주었다. 돌보지 못해 무성해진 마당의 잡초를 낫으로 베기도 했다. 그런 사정이 엄마에게 알려졌다.

마침내 삼칠일 금줄이 걷히고 그동안 차마 오시지 못했던 엄마가 우리 집에 오셨다. 그때 시어머니는 잠 못 들고 보채는 아기를 종일 안고 있었다. 아기를 받아 든 엄마는 무더위에 겹겹으로 싸매놓은 아기를 보고 기겁하더니 훌훌 옷을 벗겼다. 시어머니는 엄마의 단호한 손길에 입을 뗄 엄두를 내지 못하셨다. 아기가 시원한지 이불에 편하게 누워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엄마는 어디서 들었는지 아기도 시원하게 입히고, 손을 자유롭게 해야 소화가 잘되어 젖도 잘 먹는다고 했다. 의외로 시어머니도 고분고분 말을 따랐다. 여태 시어머니께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던 엄마가 무슨 용기로 그리했는지 의아했다. 덕분에 나도 더운 방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삼십여 년이 흐른 이제 아기였던 딸이 성장하여 엄마가 된다. 딸이 딸을 낳는다니! 새 생명을 맞이하는 기쁨에 가슴이 벅차오르지만 한편, 매사 언행에 조심하게 된다. 새록새록 그 시절의 두 어머니가 떠오른다. 시어머니의 고집스럽던 산후조리 덕인지 나는 산후풍을 크게 앓지 않았다. 당시 엄마의 애끓었을 심정을 이제야 가늠해 본다. 딸을 선호하는 요즘의 세태가 새삼 고맙게 여겨진다.

딸은 출산 후 산후조리원에서 푹 쉬고 나오겠단다. 나와 같은 우여곡절을 겪지 않겠구나! 안심하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든다. 미역국을 끓이길 하나, 아기 기저귀 한 번 갈아 줄 수 있나, 아기 목욕을 시켜줄 수 있나, 외할머니 될 나는 당장 아무 할 일이 없다.

문득 꿀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고집스럽게 다 마실 때까지 나를 지켜보시던 시어머니. 서러움을 타 마셨건만 그 꿀물처럼 달달한 맛은 그 후 만나지 못했다. 산후 꿀물은 찬물에 타야 한다, 잊어버리지 말거라!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며 꿀을 한술 떠본다. 가슴이 아려왔다. 그래, 기다려라. 딸아! 내가 꼭 꿀물 타가지고 가마. 그리움이 꿀단지에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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