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대 경영학과

광양은 빛 광(光), 볕 양(陽)자를 써서 ‘광양(光陽)’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877~943년)이 940년에 하사한 지명이다. 왕건 탄생을 예언한 도선 국사(827~898년)는 23세부터 14년간 한반도를 발로 걸어보고 37세에 자리를 잡은 곳이 광양이다, 광양은 한반도 지도를 반으로 접으면 접히는 정중앙의 최남단 끝자락이다. 백두대간이 뻗어 와서 백운산(1천222m)이 마지막으로 높이 솟은 곳, 전라남도에서 지리산 노고단(1천507m)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광양의 구봉산에 올라가면 사방으로 산들과 바다가 조망된다. 광양은 순천, 남해, 하동, 구례 등 주변의 동네가 겹겹으로 감싸준다. 그래서 광양은 따뜻하고 안온하며 바다에는 파도가 없어 살기 좋은 고장이다.

김을 처음으로 양식한 김여익(1606~1660)은 광양에 와서 보니 바다에는 파도가 없고, 일조량이 아주 풍부하였다. 그는 1640년에 광양에 와서 1660년까지 20년간 살면서 김 양식을 하였다. 햇볕이 좋아서 김 양식이 가능했다. 햇볕이 좋지 않으면 김 말리는 것이 어려웠다. 김 뜨기를 해서 하루 만에 말려야 최상의 김이 된다. 지리적으로 햇볕이 좋기에 하루 만에 말리고 좋은 김을 얻을 수 있었다. 갯벌에서 김을 키우고 육지에서 김을 말렸다. 그동안 해의(海衣)라고 불리던 김은 김여익이 김을 양식하면서 조정으로부터 그의 성을 따서 ‘김’이라고 이름을 받았다. 김 시식을 시작한 1650년 이후 1985년까지 330여년간 광양의 주 수입원이 김이 되었다. 그래서 광양은 김의 도시가 되었다.

그런데 김을 키우던 광양만에 제철소가 생겼다. 포항제철에 이어서 제2제철 후보지를 찾았는데 그 후보지가 아산만, 당진만, 광양만이었다. 그런데 광양만은 파도가 없어 방파제를 짓지 않아도 되고, 자연 수심이 깊어서 준설하지 않아도 되니 경제성이 제일 좋아 1순위가 되었다. 그래서 김을 세우던 광양만에 파일을 박아 제철공장이 들어섰다. 제철공장을 처음 지을 때는 김 양식장이 없어진다고 주민들의 반대가 많았다. 시내에 사원 주택을 지으려고 하는 데 반대하여 결국 공장 안에 사원 주택이 건설되고 학교, 문화시설이 들어섰다. 그 결과 지금은 제철소 안의 단지가 가장 살기 좋은 동네로 변했다.

김의 도시 광양에 제철공장이 들어와서 세계 최대의 제철 생산 단지가 되었다. 용광로에서 철이 나온 게 1987년도다. 30여 년간 제철을 만들어서 세계 각국으로 수출했다. 광양에서 생산되는 제철이 자동차, 가전제품, 건설용 자재, 각종 생활용품 등에 다 들어간다. 제철공장이 들어와서 광양의 인구는 8만 명대에서 15만 명대로 늘어났고 광양의 재정자립도는 전남 제1의 도시가 되었다. 기업이 성공하여 ‘김의 도시’가 ‘금(金)의 도시’가 되어 도시의 역사를 바꾸고 있다.

광양은 또한 꽃의 도시다. 이미 1천여 년 전에 도선 국사가 옥룡사를 중건하면서 비보풍수로 동백나무를 심었고, 김오천 선생(1902~1988년)이 일본에서 매화나무를 가져와서 매실농원을 만들었다. 광양은 햇볕이 좋아 꽃이 잘 된다. 추운 겨울을 지나 가장 먼저 피는 꽃이 동백꽃과 매화꽃이다. 전국에서 꽃을 보러 광양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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