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대 경영학과

십승지지(十勝之地)는 전쟁이나 기근에도 피해를 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지역이다. 조선중기의 이중환의 택리지와 정감록에서는 이러한 십승지지 10곳을 꼽았는데 그중의 3곳이 충청지역이며 공주의 사곡면 일대는 대표적 십승지지 중의 하나였다. 사곡면 일대는 북쪽에 태화산, 동쪽에 무성산, 서쪽으로는 철승산 등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산곡지역으로 그 사이로 마곡천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구곡양장(九曲羊腸)으로 흘러내려온다. 남쪽 끝에 이르러 비로소 서쪽에서 내려오는 유구천과 합하여 들을 이루다가 수구(水口)가 꼭 잠겨져 그야말로 산은 높고 들은 좁은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다. 정감록은 이곳 일대를 십승지지로 꼽았는데 여기서 주목할 곳은 첫째로는 산태극 수태극으로 물길이 형성되는 마곡사 일대요, 다음으로 눈여겨보아야 한 곳은 바둑판처럼 논밭 명당이 펼쳐지는 호계마을이다.

독립운동가인 김구선생이 일본경찰에 쫓기자 머리를 삭발하고 숨어 들어간 곳이 공주의 마곡사이며 마곡사는 대표적 십승지지로 꼽힌다. 마곡천이 산태극 수태극으로 감싸주는 곳, 마곡사의 지형지세를 보면 외부로부터 보호받는 아주 아늑한 곳이다. 그러나 사람이 살기에는 국세가 좁아 더 넓은 곳을 찾아봐야 했다.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평양에 살던 어떤 부자가 살 곳을 찾아 들어간 곳이 공주의 사곡면 호계리이다. 호계리는 마곡천과 유구천이 합수하는 곳으로 십승지지로 꼽히던 곳이었다. 1944년에 이곳으로 십승지지를 찾아왔는데 이곳은 과연 십승지지가 되었을까?

호계리는 철승산을 배산으로 좌우로는 두 개의 산봉우리가 솟았고, 앞으로는  바둑판 모양의 논밭명당이 전개되고, 좌측에는 마곡천이 좌에서 우로 횡류하며, 우측에서는 유구천과 합류하니 정감록이 말하는 십승지지가 바로 여기라고 보았다. 이곳에 둥지를 틀고 살았는데 먹고 사는 것은 문제가 없었는데 이 마을이 과부마을이 되었단다. 왜 과부마을이 되었을까? 풍수적인 문제가 무엇일까? 사방이 산과 물들로 감싸진 마을이다. 풍수적 문제를 찾는다면 배산이 문제로 보였다. 좌우의 산봉우리가 높고 V자로 파여진 뒷산이니 주산의 문제가 보였다. 풍수에서 중요한 것은 주산의 든든함이다. 뒤에 산이 있다고 배산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주산의 근본이 있어야 한다. 동네 앞 바둑판 명당에는 두 집이 있었는데 좌측의 집에서는 유명한 인물이 나왔고, 오른쪽의 집에서는 당대의 큰 부자가 나왔다. 마을의 두 봉우리를 각각 배산으로 한 논밭명당에 마곡천이 감싸주고 유구천과 만나는 평지명당에 두 개의 명당이 있었던 것이다. 바둑판에서는 4귀의 화점(花点)이 있는데 화점의 두 자리에 이미 집이 들어섰고, 남은 두 자리는 아직 비어있다. 좌상화점에서는 인물이 났고 우상화점에서는 재물이 났으니, 인물을 취하려거든 좌하화점을 취할 것이요, 재물을 취하려거든 우하화점을 취하면 어떨 것인가?

 

다음으로 다시 주목해봐야 할 곳은 마곡천과 유구천이 합수하는 사곡면 면사무소가 자리 잡은 호계리 일대이다. 이곳은 배산이 겹겹이 받쳐주고, 앞으로는 논밭명당이 펼쳐지고, 유구천이 궁수(弓水)로 감싸주며 조안산이 겹겹이 전개된다. 뒷산에 올라 마을의 국세를 전망하니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지가 바로 이곳이 아닐까 보여진다. 조선시대 이상향, 십승지지는 풍수적으로도 주산이 든든하고, 배산임수의 자연조건을 갖춘 명당지역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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