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고봉산성에서 조금 내려오니 임도가 있다. 질현성이 있는 산은 칠현산이다. 임도에서 가파른 길을 얼마 오르지 않아서 윤곽이 뚜렷한 보였다. 가파른 산길을 정신없이 올라가다가 바라보니 거의 40~50m나 되는 석성이 잡초더미 속에 묻혀 있었다.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기다시피 하면서 성벽 가까이 갔다. 나는 흥분했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줄자로 성석의 크기를 재었다.

돌의 너비는 다르나 높이는 대부분 일정하다. 너비는 45~100cm정도로 다양하고, 높이는 28cm로 일정했으며, 깊이는 50cm가 넘었다. 너비가 다르므로 돌을 엇갈리게 쌓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서 더 견고하고, 돌의 높이가 일정하므로 안정감 있어 보였다. 돌은 약간 희끗희끗해진 모습이었다. 남아 있는 부분을 세어보니 15개 층 정도 되었다.

약간 무너진 곳을 들여다보았다. 흙에 묻힌 깊이는 50cm가 넘어 보였다. 돌과 돌 사이에 잔자갈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진흙에 작은 자갈을 섞어서 다져넣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성벽 바깥쪽은 돌의 모양을 일정하게 다듬어 쌓았고 안쪽은 자연 그대로 두었다. 자연적으로 울퉁불퉁한 부분에 흙을 다져 넣었으니 단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확하게 외축내탁(外築內托)의 축성법을 사용하여 정교하게 쌓은 것이다. 그래서 1500년을 넘어 오늘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성벽의 모양이 이렇게 완벽하게 남아 있는 것이 별것 아닌 것으로 지나칠 수 있겠지만 잠시만 그 세월을 생각하면 경이롭게 느껴질 것이다. 혹자는 중국의 만리장성의 견고함을 보라고 할지도 모른다. 인도의 아그라 성을 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성들은 대개 벽돌로 찍어서 견고하게 쌓았거나 아주 연한 돌을 정교하게 갈거나 다듬어서 쌓은 것이다. 그러나 질현성과 같은 백제의 산성을 비롯한 우리나라 산성은 단단한 화강암을 정으로 쪼아 정교하게 다듬어서 쌓은 점이 다르다. 돌이 단단해서 다듬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무겁기 때문에 이동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단단하고 무거운 돌에 사람들의 몸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 모든 어려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기록에는 테뫼식 산성의 둘레가 800m라고 하는데 실측이 어렵다. 높이는 1.5m라지만 실제로 4m가 넘는 곳도 있었다. 대개 산성 연구자들이 실제 성을 답사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 현장에 와서 줄자를 가지고 실측해 보면 백제의 산성을 연구한 자료들과 많이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림성이나 임존성처럼 일부 발굴되어 복원이 시작된 산성의 경우는 그런 자료들이 잘 맞겠지만 숲에 묻혀 있는 많은 백제의 산성을 답사하고 실측해보면 기록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질현성은 계족산성의 자성으로 보이지만 둘레가 800m나 되므로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질현성은 계족산성에서 고봉산성으로 이어지는 성 줄기의 중간이다. 크기도 그 중간이다.

물론 임존성이나 학성산성, 장곡산성 같은 대규모의 성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계족산성의 자성이라고 한다면 비교적 규모가 큰 성이다. 그 만큼 중요한 요새였을 것이다. 옥천에서 회인, 문의, 청주로 가는 길목이고 견두산성과 마산동산성, 백골산성, 고리산성으로 이어지는 잇는 국경지대의 요새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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