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통대학교 행정학과

탈무드에 보면 한 젊은이가 랍비에게 [탈무드]를 공부하고 싶다고 청을 하자 다음과 같은 테스트 문제를 내면서 맞히면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랍비가 낸 문제는 “두 사람이 집의 굴뚝을 청소했네. 그런데 한 사람은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서 굴뚝에서 내려왔고, 다른 사람은 그을음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네. 자네는 어느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 젊은이는 “얼굴이 더러운 아이가 씻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랍비는 틀렸다면서 제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그 젊은이는 정답이 무엇인가 묻자, 랍비는 “굴뚝 청소를 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깨끗한 얼굴로, 또 한 사람은 더러운 얼굴로 내려왔네. 얼굴이 더러운 사람은 얼굴이 깨끗한 사람을 보고 자기 얼굴도 깨끗하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얼굴이 깨끗한 사람은 얼굴이 더러운 사람을 보고 자기 얼굴도 더럽다고 생각할 걸세”

그러자 젊은이는 테스트를 다시 한 번 할 수 있도록 청하였다. 이에 랍비는 젊은이의 청을 받아들이면서 똑같은 질문을 했다. “두 사람이 굴뚝 청소를 했는데, 한 사람은 깨끗한 얼굴로, 다른 한 사람은 더러운 얼굴로 내려왔네, 자네는 어떤 사람이 얼굴을 씻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러자 젊은이는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 씻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랍비는 젊은이의 대답이 틀렸다고 하고 있다.

젊은이는 이런 경우 탈무드는 무엇이라고 답하는지를 묻자 랍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답은 두 아이가 모두 씻지, 왜냐하면 굴뚝 청소를 했다면 깨끗한 얼굴로 내려올 수 없기 때문이니까.”

앞의 교훈은 사람들은 자신을 타인을 통해서 본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뒤의 교훈은 어떤 문제를 볼 때 마음과 눈을 열고 볼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똑같은 질문이니까 똑같은 대답이 정답일 것이라는 생각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을 타인을 통해서 본다면 자신과 타인이 똑같은 처지에 있을 때만 객관적이고 올바르게 보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과 똑같은 타인이나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탈무드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 우리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황이 다르면 그에 대한 답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과 사회의 많은 문제에는 정답이 있으면서 정답이 없다. 자신의 시각에서 보면 정답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보면 정답이 아닌 경우가 많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답인 파레토 최적의 해결방법은 이상과 관념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 사는 세상에 올바른 정답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정답이 없는 것을 정답이 있는 것처럼 찾아 헤맨다. 그러다 보니 자기주장과 자기가 내세운 정답이 올바르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속임수, 과장, 억압 등의 온갖 수단을 쓴다. 우리는 없는 정답을 찾아 헤매기보다는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주장과 다른 해답을 찾아 헤매는 노력도 필요하다. 비록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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