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 충북예술고 교사

저는 국어교육을 전공했습니다. 자연히 어원 공부도 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 전문가 그룹의 수준이라는 것이 좀 위태하다는 것을 여러 군데서 느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어원 분야였습니다. 이화여대의 이남덕 교수 같은 경우는 정말 뿌리 깊은 연구를 하는 분이라서 그 분의 어원 관련 책을 읽으며 감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어원 수준은 다른 나라에 비해 굉장히 열악한 상황이라는 얘기를 거듭 들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독립된 민족이 5천년을 생존해왔는데 어원 사전이 없다는 것이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어설프더라도 지금까지 나온 모든 어원 관련 책을 모아서 그것으로 사전을 편집해보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당돌한 생각을 하고는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1997년의 일입니다. A4 용지로 한 300장 정도 정리되더군요. 그래서 그것을 저의 활쏘기 책을 내준 학민사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검토에 들어갔는데, 출판 마지막 과정에서 멈추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낱말들의 어원이 밝혀지지 않아서 이대로 내기에는 좀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퇴짜 맞은 원고가 아직도 저의 디스켓에 담겨서 책꽂이에 꽂혀있습니다.

얼마 전에 일본으로 시집간 지인의 딸이 어원에 대해 궁금해 하기에 그 원고를 보내주고서 일본 쪽에서 우리말의 뿌리를 찾을 수 있으면 한 번 공부해보라고 권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공부가 진척되면 지난번에 제가 작업한 원고를 토대로 공동 작업을 해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언가 찜찜해서 인터넷에서 어원사전으로 검색을 했더니, 벌써 나왔더군요. 바로 이 책입니다.

말의 뿌리를 찾아간다는 것은, 우리 겨레의 핏줄을 찾아내고 거기에 서린 사고방식까지 알아낸다는 것입니다. 한 겨레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철학과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서야 어원사전이 나왔다는 것은 한편으로 자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제도권 내의 학자들은 크게 반성해야 합니다.

이 책을 쓴 강길운도 교수로 지낸 분이지만, 제도권의 변방으로 떠돈 분일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분의 책 몇 권을? 읽어보니 생각이 아주 독특하여 제도권의 중심 노릇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짐작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고생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한 편으로는 그래서 이런 위대한 작업이 가능할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의 마음 속에 있는 뿌리 깊은 열등감과 고민마저 뽑아낸 책입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 보아야 할 책입니다. 양주동의 <고가 연구> 이후 가장 제 심금을 뒤흔든 책입니다. 필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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