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깊은 밤 잠에서 깨어 집안을 서성였다. 아들, 딸들이 사용하던 방들이 휑하니 비어있다. 들어가 보니 퀴퀴한 냄새가 반겨준다. 다 함께 북적이며 살 때가 어제 같은데 어느덧 성장해 떠나가고 빈 방만이 자리하고 있다. 그동안 그들이 사용했던 가구와 사진,  책들만이 남아 빈방을 지키고 있다. 이처럼 지금은 빈방이지만 한참 때는 시끌시끌했던 방들이었다. 그런 방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내 인생은 방이 얼마나 비어가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이른 봄, 옥수수 씨앗 파종을 시작으로 참깨, 땅콩, 고구마, 고추 등 한 가지 한 가지 밭에 심겨진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밭이 가득 차 빈자리가 없다. 벌레를 잡아주고 풀도 뽑아주고 정성으로 가꾸다보면 빠르게 성장해 알알이 익어간다. 바람 따라 살랑살랑 춤을 추고 해가지면 잠을 잔다.

어루만지고 보살펴주다 보면 어느새 익어가는 냄새가 바람타고 풍겨온다. 그동안 길러주느라 고생했으니 수확의 즐거움을 맛보라고 탱글탱글 알차게 영근다. 익었다는 모습을 색깔로 표현해준다. 옥수수는 수염을 검게 나타내고 참깨는 누렇게 입을 벌려 나타낸다. 땅콩은 잎에 주근깨를 그려내면 익은 것이고 고구마는 두둑을 볼록하게 밀어 올리면 캐라는 신호다. 고추는 파란 고추가 새색시 볼처럼 빨갛게 붉어지면 익었다는 신호다. 그런 식으로 저마다의 방을 비워줄 준비가 됐음을 알려준다.

잘 익은 곡식을 한 가지 한 가지 수확하다보면 가득했던 밭이 점점 비워진다. 곡간은 채워졌지만 밭은 휑하니 비워진다. 마치 성장해 집나간 아들, 딸 방처럼 쓸쓸히 비워진다. 허전함을 갖지 않으려고 수확을 늦추면 열매는 늙어 시들어 버린다. 좋으나 싫으나 때를 놓치지 말고 거두어 들여야 한다. 어차피 언젠가는 떠나간다. 때가 되면 비워져야 할 방이 아니던가.

내 인생의 집에는 여러 개의 방들이 있다. 어린이 방, 학생 방, 직장 방, 이런 방들은 이미 비워져 빈방이 됐다. 이제 나에게 남은 방은 몇 개 없다. 그 방들이 비워져 나가기 전에 알차게 가꾸고 정리해 보기 좋게 꾸며놓고 살고 싶다. 오손도손 둘만의 방도 더 아름답게 꾸려나가고 글방도 새로이 만들어 그곳에서 꿈도 꾸어보고 싶다.

오늘은 아들, 딸들이 손자·손녀를 데리고 놀러왔다. 텅 비어있던 방들이 가득 하다. 아이들 옷가방과 장난감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다. 마치 작물이 심겨진 밭에 잡초가 무성하듯 널려있다. 잡초를 뽑는 마음으로 정리를 해본다. 가면 오고 비움은 채움을 준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빈 밭은 내년이면 다시 가득 찰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은 추수를 해 비워준다.

이제 비워져가는 밭에는 몇 가지 안 되는 작물이 남아 명맥을 이어주고 있다. 그 작물들마저 사라지면 아무것도 없는 빈 밭이 되고 만다. 집안의 모든 방들이 다 비워지기 전에 다른 무언가로 채워 보았으면 한다. 그래서 쓸쓸함을 메꿔보려 한다. 꼭 사람으로만 방을 채우라는 법은 없다. 나의 집 빈방을 메꿔줄 방법을 찾아 가득 채워 보겠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빈방이다. 하지만 오늘밤은 방들이 가득 차 보인다. 쓸쓸하지 않다. 혼자 생활했던 방에 가족으로 돌아와 가득하다. 빈방은 빈방이 아닌 채움으로 가득한 방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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