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백골산성은 관산성 전투의 종지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산성을 손에 넣은 백제의 태자 부여창은 신라의 신주군(진천)에 머물러 있던 김무력 장군의 공격으로 환산성에서 곤경에 처했다. 이때 성왕은 항산현성(추부 마전리산성)에서 후방을 지원하고 있었다. 김무력은 성왕이 부여창을 지원하러 추부에서 환산성으로 향한다는 첩보를 입수해 삼년산성에 있던 비장 도도를 시켜 관산성 아래 구진벼루에서 사로잡아 참수하게 했다. 부여창은 김무력과 도도의 전광석화 같은 공격으로 환산성을 버리고 백골산성까지 쫓겨 여기서 전멸하다시피 했다. 성왕의 아들 부여창은 겨우 몇명과 함께 부여로 도망가서 위덕왕이 됐다. 이로써 관산성전투는 여기서 종지부를 찍었다. 삼한일통을 위한 성왕과 진흥왕의 경쟁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백골산성을 찾아간다. 마음이 정해지면 머뭇거리지 않고 출발해야 한다. 대전시 동구 신하동 어느 식당 옆에 차를 세웠다. 커다란 식당 간판 옆에 ‘백골산성 입구’라는 아주 작은 이정표가 보였다. 거리는 가깝다. 해발 340m이니까. 늘 혼자 가지만 산성에 혼자 가는 것은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은 곳인가. 여기저기에서 원혼이 묻어나는 느낌이다.

땀에 온몸이 젖을 때쯤 이정표에 ‘백골산성 500m’라 되어 있다. 정상에 가까워지니 잡목 속에 돌무더기가 보였다. 헤집어 보았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이다. 축성 방법을 알 수 있는 부분을 찾았으나 찾을 수 없다. 이끼 낀 돌들은 크기는 일정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상당히 크다. 회남에 있는 호점산성과 같이 납작한 점판암이 아니라 커다란 돌덩이다. 둘레가 400m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 많은 돌을 어디서 다 옮겨왔을까.

정상에 오르니 절경이다. 여기부터 북으로 회남, 문의로 갈라지는 물길이 확연히 보인다. 그것은 여기서 회남을 거쳐 보은으로 향하는 길도 관측되고, 문의를 거쳐 청주로 향하는 도로도 관측이 된다는 말이다. 서쪽으로는 계족산성이 코앞이다. 바로 꽃님이반도를 건너 마산동산성을 밟고, 견두산성을 건너뛰면 계족산성에 바로 내려앉을 수 있을 것 같다. 동으로 환산성이 바로 거기이다. 환산의 기슭에 있는 집들이 손에 잡힐 듯하다. 남으로 식장산이 보인다. 고리산성과 식장산 사이에 관산성이 거기이다. 시야가 이렇게 넓으니 금강 유역의 육로와 수로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을 것이다.

커다란 참나무 아래 납작한 돌을 놓고 앉아서 여기서 죽었다는 2만9천600명의 백제인을 만나 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나는 노트를 펴놓고 그들이 나타나 당시의 애환을 이야기해줄 때를 기다렸다. 주변에 거대한 참나무들은 백제인의 피를 길어 올려 살찌우고, 백제인의 숨결을 받아 광합성을 한다. 흙은 그들의 피와 살이고 공기는 그들의 날숨이다. 사실은 모두 백제의 원혼이다. 이제는 저렇게 물에 다 묻혀 버릴 땅을 지키고 빼앗으려고 아까운 목숨을 버린 것이다. 성석을 비집고 큰꽃으아리가 하얗게 피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그리워한 그들의 아름다운 영혼이다. 혼자서 한 시간은 앉아 있었다. 글 한 편을 잡아냈다. 바람이 분다. 등골이 서늘하다. 내려오는 길이 씁쓸하다. 1500년 전설 같은 이야기를 놓고 너무 상심할 필요는 없다. 나는 공연히 생각이 많아 지팡이 두 개로 짚으며 비틀비틀 비탈길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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