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수필가

오르막길이 가파르다. 산봉우리처럼 볼록 솟아오른 제 4보루에 올랐다. 해발 556.1m이다. 망루 역할만 했는지 성 내부가 그렇게 넓지 않다. 둘레가 107m밖에 안 되는 테메식 산성이다. 우거진 잡목을 헤집고 성벽을 찾았다. 흙에 덮여 있는 성돌이 금방 드러난다. 사람들이 훼손하지 않으면 역사는 그대로 남는다.

대청호의 아름다운 모습이 다 내려다보인다. 대전에서 회인을 거쳐 문의 청주로 가는 길, 보은으로 가는 길도 다 관찰할 수 있다. 보은 삼년산성에 신라의 사령부가 있었다면 여기서 바로 통할 것이다. 말을 달리고 창을 들고 진격하고 부딪치던 들판은 저렇게 물에 잠겨 말이 없다. 비탈길은 고요하기만 하다.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바로 해발 581.4m, 제 5보루이다. 여기서 바로 정상 헬기장이니까 등산객이 머물지 않고 그냥 지나치나 보다. 우리는 잠시 앉아서 쉬었다. 둘레 300m나 되는 보루는 거의 훼손되었다. 1970년대 예비군들이 주변에 성돌을 주워 만든 참호의 흔적이 남아 있다. 1500년 전 요새가 1970년대에도 요새가 되었다니 머문 역사처럼 느껴져 답답하다. 이제 예비군 참호도 잡초에 묻혀 있다.

정상 헬기장을 지나 578m봉에 올랐다. 동봉이다. 이곳에 오르막길은 길지는 않지만 경사가 아주 심하다. 현대인보다 체력이 약했을 옛사람들이 여기를 오르내리며 얼마나 힘겨웠을까? 돌이 다른 곳보다 더 많이 흩어져 있다. 성의 흔적이 정상보다 더 뚜렷하다. 이곳이 최종 보루인 제 6보루이다. 정상과 거의 맞먹는 높이인데다가 동쪽으로 툭 튀어 나와 있어서 주변을 살피는데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당시 백제 성왕은 나이가 많고 경쟁자 진흥왕은 젊었다. 백제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라 바꾸고 정치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영토를 넓혀 세력을 확장하면서 미래를 설계했다. 성왕은 일본과 가야와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30여년이나 국가 부흥에 힘썼다. 그러나 영토 확장에 힘쓰느라 백성의 후생에는 관심이 없었나 보다. 당연히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을 것이다. 그런 성왕이 구진벼루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는 과정은 역사가 아니라 차라리 드라마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산천은 말이 없지만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한다. 거대한 역사의 물길은 때로 어느 한 사람의 판단에 의해 흘러가는 길을 바꾸어 버린다. 그런 바람에 수많은 후대인들이 그 흐름에 함께 휩쓸려 흘러갈 수밖에 없다. 나도 1500년 전 그들의 판단에 의해 정해진 오늘을 거스를 수가 없다.

내려오는 길은 예상대로 경사가 급하다. 게다가 칼날 같은 돌이 삐죽삐죽 솟아 있어서 한번 엉덩방아를 찧으면 금방 병원으로 가야할 판이다. 올라가는 길보다 더 힘들고 무릎이 부서지는 기분이다. 군데군데 줄을 매어 놓아서 그나마 괜찮았다. 내리막길은 2km도 안되는데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1시간 이상 걸렸다. 내리막길은 산에서나 인생에서나 더 조심스럽고 어렵다.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산 아래는 고요하지만 아름답기 이를 데 없었다. 부소담악과 추소정에 이르는 병풍바위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