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디제라티 연구소장

조선시대 세종대왕은 일찍이 청주를 두 차례나 방문해 초정약수를 이용해 질병을 치료하며, 이곳에서 한글 창제를 마무리했다. 이에 그 업적을 기리는 제12회 세종대왕과 초정약수축제가 5월 25일부터 27일까지 내수읍 초정리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또한 ‘초정르네상스’ 사업의 일환으로 초정 행궁 재현 건립이 2019년 9월 완공될 예정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런데 행궁 복원은 유구와 사료가 미미해 기존의 다른 행궁도를 참조해 재현된다. 

이에 조선 후기 여항(閭巷:서민) 시인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의 시문집인 ‘추재집(秋齋集)’에 실린 조선시대 여러 왕들이 다녀갔던 온양 온천 온정기(溫井記)를 통해 초정행궁 주변시설과 탕실(湯室:목욕간)의 옛 모습을 그려본다.

온양 온천은 조선시대 동안 꾸준히 왕실에서 애용(愛用)한 곳으로 상당히 화려한 행궁을 세우고 훌륭한 시설을 갖추었다. 온천 근처에 행궁이 온천 위쪽으로 임금이 직접 목욕하던 욕실 전각(殿閣)인 벽전이 있었다. 행궁 동쪽에는 쓰지 않는 온정이 두 곳이나 있다. 예전 목욕간이라 하는데 담장을 두르고 궐문이 만들어져 있다. 안쪽으로는 시중드는 궁녀와 내시들의 처소, 바깥쪽으로는 호종(扈從)한 신하들의 숙소가 있다. 이곳에는 휘장(揮帳)이나 발, 병풍, 서안(書案:책상) 등 여러 가지 임금께 올리던 기물(器物:각종 물건)들이 갖추어져 있다. 이러한 시설은 대개 영조(英祖) 경오년(1750) 이후 왕의 거둥(擧動:나들이)이 없기 전까지 사용됐다.

욕실 전각은 남북 방향으로 기둥이 다섯이고 동서 방향으로 기둥이 넷이다. 옥돌로 돌함정 가운데를 빙 둘러 붙여서 두 개의 온정을 만들었다. 마치 한 방인 것 같지만 가운데를 막아 놓았다. 온정의 깊이는 6자 정도인데 세로는 16자가 되고 가로는 8자가 된다. 초정원탕(물이 솟아 오른 샘)은 이규경의 ‘상당초정변증설’에 따르면 작은 돌을 쌓아 원탕의 벽을 만들었는데 지름이 8척(尺:2m4cm이고 깊이가 1장(丈:10척:3m)로 온양 온정과는 크기가 좀 다르다. 

온정 곁에 세 개의 구멍이 나 있어 그곳에서 고인 물이 흘러나온다. 전각의 벽 밑으로 나오기 때문에 안쪽의 두 온정을 상탕(上湯), 중탕(中湯)이라 하고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하탕(下湯)이라 한다. 상탕에서 하탕까지의 거리는 적어도 10여 보는 족히 된다. 초정원탕도 상중하탕 3곳이 있는데 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솟아오른다. 온정에는 거북이나 물고기, 게와 같은 동물이나 연꽃과 마름과 같은 물풀도 없고 완상(玩賞:즐겨 구경함)할만한 보옥(寶玉)이나 기교있게 아로새긴 치장이 없이, 돌의 재질이 뛰어나며 제작이 완벽하고 치밀하다. 목욕소(沐浴所)에는 물을 데울 수 있는 기관실(機關室)을 두었다.

이번 축제는 다른 해보다 역사와  청주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참여 체험프로그램이 훨씬 돋보인 축제였다. 다만 옥에 티라고 하면 (주)일화에서 소유한 초정 상탕에 해당하는 초정영천(椒井靈泉)에서 공개한 물조차도 전혀 약수 특유의 톡쏘는 맛이 거의 사라졌다는 아쉬움이다. 프랑스와 독일 등 서구 지역의 명품 약수의 탄생 비결이 땅 속에 있음을 거울삼아 축제와 행궁 건립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광천수 보존관리에 대한 체계적인 수질은 물론 지질 연구가 시급히 필요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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