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골목을 들어서니 벽마다 그림이 가득하다. 사람, 연탄 등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며 시선을 이끈다. 골목 어디선가 가위를 짤깍거리며 엿장수가 나타날 것 같다. 지나치는 바람마저 옛날 바람이다. 요즈음 어딜 가든지 벽화가 그려져 있어 관광객들의 시선을 끈다. 지역 특색에 맞는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하루의 쉼터, 피로를 동반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가로등 불빛이 집안 곳곳을 방문할 즈음 단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왔다. 거실을 이리저리 오가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났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다. 가로등에 비춰진 나의 초상화였다.

정신을 가다듬고 이곳저곳 살펴보니 벽마다 벽화가 그려져 있다. 뚜렷한 형체를 알 수 없지만 그 벽화속을 내가 지나치고 함께하며 있는 것이다. 누구의 솜씨일까 나무도 있고 난간대도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벽화에 나타난 그림의 주인공은 베란다 난간대와 화분, 아파트 정원의 단풍나무 그림자였다. 흑백으로 그려진 벽화가 반갑다고 손짓하듯 흔들린다. 집안에 벽화마을이 만들어져있다.

가로등은 늦은 시각까지 근무하며 홀로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잠에서 일찍 깨어난 나의 무료함을 달래주려고 열심히 그려내고 있었다. 달 없는 그믐밤엔 가로등 홀로 쓸쓸히 그려내고, 달빛 밝은 날에는 둘이 합작으로 그려준다. 그런 날에는 그림이 겹쳐지기도 한다.

비 내리는 날 밤. 베란다 유리창에 빗방울이 맺히면 벽화 마을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물방울이 그려내는 오묘한 세상이 그림이 되어 나타난다. 흑백이 아닌 오색찬란한 영롱한 빛깔로 그려진다. 보는 사람 없어도 열심히 그려낸다. 벽으로 가로막혀 소통이 차단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려고 벽화가 탄생된다. 웃음주고 다독여주는 화목한 가정을 만들며 살아가라고 멋진 벽화를 선사한다.

바람 부는 날에는 한편의 영화를 감상하는 것 같다.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제작하는 한편의 영화는 말 타고 전쟁하는 장면도 연출하고, 에로 영화도 제작한다. 눈 비 내리는 날에는 웅장한 폭포도 등장하고 별빛 내리는 장면도 연출한다.  집안이 훈훈해진다.

벽은 경계다. 모든 것을 분리한다. 국가와 국가, 방과 방을 나누는 답답한 구조물이다. 벽은 허물어야 한다. 답답함을 해소시키려 벽화를 그려 넣음으로 딱딱함을 날려준다. 벽화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평화다. 벽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을 그림으로 넘나들게 한다. 이웃과의 막힌 벽을 벽화가 열어준다.

깊어가는 밤. 가로등의 유일한 친구 경비아저씨의 모습도 벽에 그려진다. 다양히게 살아 움직이는 우리집 벽화다. 깜짝 등장했다 사라진 아저씨를 대신해 달빛이 찾아든다. 벽화는 다시 겹쳐져서 그려진다. 한밤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벽화감상, 어느새 날이 밝아온다. 벽화는 가로등과 슬며시 퇴근한다.

바쁜 일과 속에서도 집집마다 찾아가 시름을 달래주고, 웃음을 주며 화해도 시켜주는 벽화. 벽화 속에서 삶을 찾고 인생을 스케치해본다. 벽화가 지겹다 느껴지면 바람이 불어 교정해준다. 우리네 인생도 지겹다 생각될 때 슬쩍 바람이 불어주어 흔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살아간다. 태풍이 아닌 행복 가득한 미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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