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석 한국교통대 산업경영공학과 교수

인간은 동물이다. 단순한 동물이라고만 할 수 없는 존재이다. 동물성이라는 나무에 인간성이라는 나무를 접붙여 생긴 나무가 인간인 셈이다. 오늘날 교육 현장에서는 그 나무가 바르게 자라는지는 신경 쓰지 않고 빨리 자라기만 하면 좋다는 사고방식이 퍼져 있다. 서두르기보다는 느긋한 편이 좋다. 이것이야말로 교육의 근본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에 대한 감정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요소이다. 유인원에서 출발해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것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됐음을 의미한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은 녹록하지 않다. 가장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감정이다.

갓난아기의 성장 과정을 심리적인 측면에서 관찰해 봐도 그렇다. 인간은 세 살만 되어도 감정의 흐름을 감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만 알 뿐 타인의 감정에는 무지하고 무심하다. 타인의 감정까지 헤아리려면 다섯살은 돼야 한다. 세살에서 다섯살까지의 2년여 기간은 감정이 답보에 빠진 상태이다. 도덕이나 예의범절의 근본을 가르쳐도 효과를 보기 어려운 것도 그래서다.

정서가 싹트고 미음이 성숙해지는 시기는 분명히 존재한다. 유체와 정신이 똑같이 성장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간과한 채 한 가지만 보면서 좋고 나쁨을 가리려 한다.

오늘날의 교육 현장에서는 동정심이나 배려하는 마음을 키우려는 노력이 무시되곤 한다. 그 결과 청소년 범죄가 갈수록 무자비해지고 잔인해진다. 동물적으로 빠르게 성장한 머리는 학문과 맞닿는 접촉면을 갖기 어렵다. 머리 크기가 크다고 학문을 잘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학문은 머리로 한다는 통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정서가 학문의 중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에게는 교감 신경 계통과 부교감 신경 계통이 있다. 보통은 양쪽이 균형을 이룬다. 교감 신경 계통이 주가 되어 움직일 경우를 생각 해 보자. 교감 신경 계통의 지휘를 받는 인간은 천천히 목표에 다가간다. 위장의 움직임도 둔해진다. 부교감 신경 계통이 활성화되면 신이 나서 일한다. 거침없이 글을 써 내려간다. 100미터 달리기하듯 전력 질주한다. 이 상태가 지속되다 보면 위장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활발해진다. 자칫 설사를 할 수도 있다.

미국의 한 의학자가 개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교감 신경 계통을 절단하는 실험이다. 개는 설사병에 걸렸고, 대장에 궤양까지 생겼다. 인간이나 개나 근본적 생리는 다르지 않다. 감정에 부조화가 생기면 설사하기 쉽다. 정서의 중심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것이 신체 전체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 중심은 대뇌피질 안쪽의 머릿속에 있다. 이곳에서 두 종류의 신경 계통을 지배한다. 정서의 중심을 넘어 인간 존재의 중심이 이곳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정서가 인간 발육을 좌우한다. 그런 맥락에서 정서를 키우는 교육이야말로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정서 교육이 중요하다기보다는 오늘의 정서가 내일의 머리를 만든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열등생들은 정서의 중심이 잡혀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가르치는 사람은 이 점을 특히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문은 재능이나 잔재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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