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한국폴리텍대학 청주캠퍼스 학장

고된 세상살이에서 반듯한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우리 대부분은 신념과 타협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갈등하며, 현실과 이상의 중간지대에서 헤매고 번민에 빠진다. 신념을 버린 변절은 비정의가 자신에게 더 많은 이익과 혜택을 가져다준다는 경험적 체득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 언제든 배신하고 변절하며 부정하고 부패할 수 있다는 위험성에 노출돼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는 단일 토지세를 주창한 그의 저서 ‘진보와 빈곤’에서 “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라고 역설한다.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인간은 어떻게 먹고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끝없는 자기 내부적 고민에 직면한다. 거기에 남들보다 더 잘 먹고살기 위한 인간의 탐욕적 욕망이 더해질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부패한다. 신념의 실종에서 오는 서늘한 결과이다.

상식적 사회는 보편적 가치 사회의 다른 말이다. 일한 만큼 대가를 받고 사는 사회, 자식 교육에 있어 감정적이지 않고 객관성을 유지하며 공교육에 온전히 의탁하는 사회, 소외되고 아픈 이들을 배려하는 사회, 분배와 정의가 강물처럼 담대하게 흐르는 사회가 온당한 상식적 사회이다. 그 안에 인간이 있고 반듯한 신념이 내재돼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오늘을 보라. 이익의 혈투 앞에 너무도 뾰쪽해서 사방이 가시투성이의 사회를 고단하게 살고 있다.

스페인의 거장,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종교와 신념에 대한 영화 ‘아고라’에 등장하는 이집트의 실존 인물인 수학자이자 철학자, 히파티아는 여성이다. ‘콘스탄트 가드너’를 통해 레이첼 와이즈의 흡입력 있는 연기에 빠졌었고,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그녀가 분한 히파티아의 고난에 실존적으로 동감했으리라 여겨진다. 히파티아에게 있어 신념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가치였다. 이교(異敎)의 선포 자라 해 그리스도교도에게 참혹한 죽임을 당하는 그녀는 ‘신념을 강요해서는 안 돼, 절대 그러지 마’라고 울부짖는다.

인간은 신념이 무너지면 살 수 없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렇다. 삶의 중심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 속절없이 무너지는데 그 무엇에 삶의 가치를 기대여 살 수 있겠는가. 히파티아를 희생시킨 종교적 맹신과 야만적 선동은 후세의 오늘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인간 사회의 반복적인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해준 영화 ‘아고라’는 십여 년 전에 제작된 영화이지만 오늘날에도 그 날선 풍경은 계속되고 있다. 터미널과 기차역, 지하철역 앞에서 대중들이 밀집하는 장소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맹신도들의 피케팅과 요란한 확성기의 이질적 모습은 신념에 찬 행동이 아닌 배타적 신앙의 자화상이다. 타인에 의해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지 말라던 히파티아의 절규와 오버랩된다.

하나 더, 신념을 지키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생존할 수 있다는 상식적 사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힘들어도 애써 눈 감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다면 신념과 생존을 분리하지 마시라. 옹색한 자기 합리화임을 모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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