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부남/서양화가

▲ 충북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공예마을에 자리 잡은 서양화가 손부남(61). 거주하는 공간이 그가 굳이 ‘상생’을 평생의 화두로 삼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상생(相生)’연작은 우주의 삼라만상(인간과 동물, 식물 등)이 더불어 살아간다는 실상을 물감과 붓 등 한정된 표현방법에서 벗어나 해외 여행지에서 구입한 물건이나 누군가 버린 물건들을 오브제로 활용해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이미지를 담아내는 작업이다.
▲ 스물세 번째 개인전 ‘상생(相生)-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연작. 백자 도자기가 갖고 있는 물질적 특성에 자신의 회화 작업을 어떻게 조화시켜 볼 것인가 고민한 작품이다. 이번 작업은 백자의 이미지처럼 단아하고 정제된 표현이 특징이다.

23번째 개인전 ‘상생’ 연작…백자 도판에 회화작업

어둡고 고통스러운 삶 견디고 명상 잠긴 단아한 작품

예측불가 특별한 조형언어 만들어지는 과정 흥미로워

線통해 원시적인 동·식물 형태의 회화 이미지 표현

그림 그리는 작가가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40년을 탐색한다는 것은, 그 주제가 갖고 있는 여러 이야기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여러 이야기라는 것은 표현의 다양성과 주제가 상징하는 이미지, 이미지가 내포하고 있는 작가의 의식 등이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거나 절벽의 문양을 변형시키는 것과 비교하면 될까.

서양화가 손부남(61)은 스물세 번째 개인전 ‘상생(相生)-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에서 그의 평생에 걸친 화두 ‘상생’을 새롭게 이야기 하고 있다. 이미 이십여 차례의 개인전에서 ‘상생’을 표현한바 있는 그는 아직도 상생의 본질을 캐고 있는 중이다. 이번 ‘상생’ 연작에 대해 그는 “원점으로 돌아와 본래의 점을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 출발점에 선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의미일까.

전시 때마다 매번 다른 조형성을 보여줬던 그가 2년 전 스물두 번째 개인전의 상생은 뭔가 암울했다. 철과 고가구 등을 이용한 오브제 작업은 전시장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 들었으며 캔버스에 표현한 회화작업은 중첩되고 중첩돼 탁하고 어두웠다. 작가의 작업은 작가의 삶이 처한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20대에는 교사직을 버리고, 중년에는 대학 강단에 설 기회를 접는 등 오직 ‘작가의 길’만을 걷고 있는 그가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특히 이 무렵 작가로서, 혹은 개인의 삶 속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터널의 정점이 스물두 번째 상생에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상생’은 오직 어둡고 고통스러운 터널을 지나온 사람만이 느껴볼 수 있는, 마치 피안(彼岸)의 경지에서 작업한 것 같았다. 매끄럽고 찬 질감의 백자 도판에 회화를 접목해 담담하고 정갈했다.

그가 이번 작업에 중점을 둔 것은 백자 도자기가 갖고 있는 물질적 특성에 자신의 회화 작업을 어떻게 조화시켜 볼 것인가였다. 작업에 있어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그는 오랫동안 도자기가 갖고 있는 고유의 물성을 좋아했다. 도자기에 대한 애착을 자신의 회화작업과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 고민하던 차에 방법을 찾은 셈이다. 평생 서로에게 예술적 도반인 도예가이자 현대미술작가인 이승희(60)의 도움이 컸다. 이승희가 10년째 작업하고 있는 중국 전통도예 도시 경덕진 작업실을 방문하면서 애착은 곧바로 창작의 영감이 되었고 작업을 하고 싶다는 욕구에 불을 댕겼다.

“지난 봄 몸과 마음이 몹시 지쳐있었을 때 이승희 선생의 권유로 경덕진을 가게됐습니다. 처음에는 쉬러 간 것이었죠. 가보고 놀랐습니다. 도예와 관련한 모든 작업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런 시스템에서 작품을 안 한다는 것이 오히려 바보죠. 작가로서 해왔던 고민을 실현해볼 수 있는 기회가 온 거죠. 작업을 하고 싶다는 의욕이 생겼어요.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죠. 짧은 기간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작가는 언제 열정이 살아날지 모르는 화산같아요. 그 기회를 준 이승희선생에게 고맙죠. 이번 작업은 그렇게 우연히 시작돼 뜻하지 않은 수확을 얻은 것입니다.”

경덕진 지인의 공간에서 얻어진 특별한 기회가 자신의 삶을 피안의 세계로 옮겨 놓듯이 새로운 ‘상생’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백토로 만들어진 평평한 도판에 흙물을 찍어, 그가 즐겨 그리는 새와 나무, 사람의 이미지들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그리면 도톰하게 입체적인 두께감이 살아난다. 그 위에 유약으로 청화 혹은 철사의 안료를 칠해 가마에서 그릇을 굽듯 굽는다. 일부 작품은 철사 안료 위에 한 번 더 금물을 칠해 800도의 가마에서 재벌구이 하는데, 이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긴다. 마치 의도적으로 물감을 흩뿌린 것처럼 가마 속에 들어간 작품이 불을 만나 안료가 녹아내리는 과정에서 생각지 않았던 조형미를 연출해준다. 일단 가마 속으로 들어간 작품은 작가가 더 이상 컨트롤 할 수 없다. 가마 속의 불이나 작가조차 예측할 수 없는 특별한 조형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체험한 것이다.

“평소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지만 새로운 재료를 대할 때마다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시도해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불안하지만 그 불안자체가 매력이죠. 특히 도자 작업은 불과 관련 있기 때문에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의도하지 않은 작품이 되거나 실패할 확률이 많죠. 이번 작업은 고생한 만큼 성과가 좋았습니다. 경덕진이어서 가능했다고 봅니다.”

여러 개의 도판을 이어 하나의 대작으로 완성하거나, 작은 도판이 독립된 작품이 되기도 한 이번 작품의 공통점은 백자의 차고 깨끗한 질감과 철사 안료의 어두운 색이 어우러져 화면이 좀 더 단아하고 정제됐다는 점이다. 특히 여백의 미를 살린 드로잉작업은 마치 한지에 한두 번의 가벼운 붓질이 오간 것처럼 단순하고 담백해 작가 스스로 명상에 잠겨 작업한 느낌이다. 캔버스 화면에 색채의 중첩을 통해 무엇인가를 가득 채웠던 이전의 ‘상생’과 다른 ‘상생’은 그가 삶을 아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음을 직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가 이번 작품을 ‘원점’이나 ‘새로운 출발’이라고 말하는 것과 맥이 닿은 것이다.

충북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공예마을에 자리 잡은 손부남은 거주하는 공간이 그가 굳이 ‘상생’을 평생의 화두로 삼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충북의 공예인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공예촌에 회화 작업을 하는 작가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그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 범주는 공예적인 것이나 판화, 설치 등 굳이 장르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도예가가 만드는 컵에 자신의 그림을 그려 공예가 갖고 있는 쓰임에 예술적 가치를 입혀보는 것이다. 더불어 함께, 콜라보레이션을 이루는 일이 어쩌면 그가 추구하는 작업세계 ‘상생’을 설명할 수 있는 사례다.

그가 상생을 통해 담아내는 이미지들은 늘 우리 주변에서 흔히 존재하는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영감을 받는 곳은 자연이다. 색과 형태의 변화를 꾀하면서 부드러운 선과 색의 중첩을 이용해 그 안에서 새로운 형태, 즉 풀잎, 씨앗, 나무, 동물 등을 기호화시켜 상징화하는 작업을 해 왔다. 중첩된 채색위에 즉발적이며 충동적인 붓질로 그가 지속적으로 탐색한 선(線)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간이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문명이전, 원시적인 이미지형태를 만들어낸다. 마치 거대한 원시림 속에 숨은 그림처럼 온갖 동·식물의 이미지가 가득 들어있는 것이다.

그의 무수한 ‘상생(相生)’ 연작들은 우주의 삼라만상(인간과 동물, 식물 등)이 더불어 살아간다는 실상을 물감과 붓 등 한정된 표현방법에서 벗어나 해외 여행지에서 구입한 물건이나 누군가 버린 물건들을 오브제로 활용해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이미지를 담아내는 작업이다. 때로는 이미 누군가 사용하고 버린 쓰레기이거나 남들이 간과한 이미지처럼 보인다. 하찮은 무엇을 그만의 직감력으로 되살려내는 과정에서 작가의 감성변화에 따라, 혹은 삶의 부침에 따라 어둡고 칙칙하기도 하고 밝고 단아하기도 하다. 그야말로 다음 작업을 예측할 수 없는 그 ‘상생’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그의 작품은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작가가 의도해 관객에게 부여한 재미지만 과연 관객만의 재미는 아닐 것이다. 무수한 상생을 그려내며 그 스스로 재미에 빠지지 않으면 불가능할 작업이다.

그가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했듯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에 섰다. 이 전환점에서 그는 무엇을 가득 채워 나갔던 시절을 지나 이제 하나씩 비우고 내려놓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작가 스스로 외로움 속에 고립되거나 의도하지 않은 고통에 맞닥뜨리거나. 어쨌든 모든 삶의 여정 속에 취사선택하는 것이 작가의 몫인 것처럼 그는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선택했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초심이며, 태초이며, 유년을 상징하기도 한다. 화가로서 기교를 터득하기 이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던 ‘작가적 원형’을 비로소 마주하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이순(耳順)에 접어들어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됨이 어떤 것인지 엿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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