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에디슨이 전화기의 발명에 열중하고 있을 때 원통에서 ‘부웅’하고 잡음이 생기는 것을 들었다. 자세히 관찰해 보니 침금(針金)이 회전하고 있는 원통에 접촉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보통의 엔지니어라면 그 침금이 원통에 닿지 않도록 해서 잡음이 없어지면 그것으로 끝나 버렸으리라. 그러나 발명왕 에디슨은 이 현상에서 힌트를 얻어 녹음기를 만들어냈다. 지금의 이 찬연한 오디오 문화, 녹음 문화는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사건에서 얻은 힌트를 활용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종이 한 장의 차가 인류의 행복, 풍요에 공헌한 바는 지극히 큰 것이 아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에디슨의 인류에 대한 큰 선물이 된 영화를 생각해 보자.

경마의 판정이나 말이 달리는 모습에 관한 토론에서 사진기를 쭉 줄지어 세워놓고 계속해서 촬영해 보면 알지 않겠느냐 하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리고 다시 그 사진을 빠른 속도로 돌아가게 하자 말이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행운이 찾아왔고 이것이 영화를 만들게 했던 것이다. 사소한 일, 아주 작은 요구나 희망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이 되겠느냐고 팽개쳐 버리면 아무것도 이룩될 수가 없다. 좌우간 무엇이 되던 한 번 해보자고 달라붙어야 무엇이든 만들어 질 수가 있다. 바로 이 차이, 즉 종이 한 장의 차이로 해서 새로운 것이 탄생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인간은 죽어 버리면 똑같은 두개골(이 되는데도 한 장의 가죽에 지나지 않는 얼굴의 미추에 얽매이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하고 한탄했다지만 그 가죽 한 장이 없다면 화장품 산업은 성립될 수 없으며 미용원이나 사진관도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종이 한 장의 차, 가죽 한 장의 차가 옥이 되기도 하고 돌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조그만 한 판단의 차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생기는 것은 비단 발명, 창조의 세계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만약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역사는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하듯이 이 차이는 모든 분야에 그대로 적용되는 세상의 원리다. 상점에서 손님이 물건을 사가지고 나갈 때 “감사합니다”하는 말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과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간단한 인사 한 마디는 그 상점의 번영과 실패에 결정적 기능을 하는 것이다.

종이 한 장의 차가 천지의 차가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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