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디제라티 연구소장

청주시에서는 세계 3개 광천수 중 하나인 초정약수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19년 3월 개관을 목표로 내수읍 초정리 일원에 행궁 조성사업을 추진해 행궁을 재현할 것이라고 한다.

현재 초정원천이 있는 곳은 조선시대 세종임금과 세조임금이 다녀갔고 후에 불타 없어졌지만 기록에 의하면 행궁이 있었다. 특히 세종 때에는 2회에 걸쳐 123일 동안이나 머물러 당시에는 물론 그 이후에도 왕이 다녀가신 약수터를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기 위해 궁장토(宮庄土)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한 1912년 작성한 토지대장에는 이 일대 10필지가 창덕궁(昌德宮) 소유로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보다 1년 후인 1913년에 작성된 지적도에 의하면 이 필지 등은 경선궁(慶善宮)의 궁장토로 되어 있는 등 청주지역의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왕실소유 재산으로 명기되어 있다.

한동안 세종임금이 잠시 머물다 가신 내수읍 선암2구 주왕리(住王里)와 현 초정원천이 있는 곳 등 두 곳 중 한 곳에 행궁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학계의 주장이 있어 왔다. 그러나 토지조사사업 이전의 양얀(量案)이 없어 단정을 지을 수 없지만 일제가 조사한 토지대장에는 이 부근에 궁장토는 단 한필지도 없고 초계변씨 등 개인 소유가 대부분인인 것으로 보아 이 곳은 어원 그대로 임금이 잠시 나들이했던 곳으로 보여 진다.  

경선궁은 고종황제의 후궁이며 영친왕 이은(李垠)의 어머니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궁호이다. 엄씨는 1901년(고종 38) 순비(淳妃)에 책봉되어 경선(慶善)이라는 궁호를 하사받았다. 이때부터 순비의 호칭과 재산을 관리하는 궁가를 경선궁(慶善宮)이라 부르게 됐다.

창덕궁은 조선 왕조 사상 가장 오랜 기간 왕의 주 거처로 쓰인 궁궐이었으나, 경술국치(1910년) 이후에는 구대한제국황실이 창덕궁 이왕(李王)으로서 창덕궁을 소유했으며, 일제의 패망 이후 1947년 미군정에 의해 정부에 몰수됐다. 그러니까 조선이 망하고 일제감점기의 창덕궁은 조선왕실 사무를 총괄하는 기관이었다가 후에 이왕직으로 다시 바뀐다,

위의 경선궁과 창덕궁의 관계로 볼 때 초정행궁 부근은 조선시대 세종이후부터 초정약수터 부근을 관에서 관리하는 역둔토(驛屯土)나 궁장토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하여 고종 때에는 경선궁으로 소유가 바뀌고, 다시 토지대장이 완료되는 시기에는 창덕궁으로, 1939년에는 이왕직으로 소유권이 넘어가는 등 줄곧 왕실소유의 토지였음이 이 곳에 행궁이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또한 초정부근 일부 토지는 일제의 토지 국유화 정책에 따라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강제로 매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이 대한 연구는 ‘경선궁추수기(慶善宮秋收記)’ 청주 북강내일면편 등을 연구하면 좀 더 확실한 증빙 사료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초정행궁 조성공사는 2017년 9월경 시작해 내년 말까지 마무리한 뒤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 할 계획이라고 한다. 세종대왕 행궁 조성사업이 완료되어 초정약수축제와 행궁의 문화적 콘텐츠 개발, 세종의 한글창제 등과 연계돼 청주의 대표적 관광 상품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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