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영진(金榮振) / 민속학자
충북민속문화연구 분야의 대부
방언연구 시작으로 민속학 입문
도내 중요한 문화재 발굴에 기여

▲ 2010년 청주농악보존회 회장을 맡아 청주농악 기록화 작업을 진행한 후 청주농악시연회 현장에서 김영진 박사의 생전 모습. <사진제공=사진작가 송봉화씨>
▲ 유고집 ‘충북문화사전’(태학사/ 3만5천원)

1984년 청주대 박물관장 시절

흥덕사지 발굴·직지 인쇄터 확인

 

청주농악·설계리 길쌈 노래 등

민속 복원·기록·전승 평생 연구

 

유가족·정종진 교수 도움으로

유고집 ‘충북문화사전’ 출간

향토사 연구에 좋은 자료 될 것

 

흥덕사지 발굴과 ‘직지심체요절’의 흥덕사지 인쇄 확인 등 충북민속문화연구 분야의 대부로 알려진 고 김영진 박사(1937~2016년)가 남긴 유고집 ‘충북문화사전’이 출간돼 충북향토민속문화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고 김영진(金榮振) 박사는 청주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충남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은 후 1966년부터 2002년까지 청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재직 중에 인문대 학장, 청주대박물관장 등 보직을 맡았으며 충북의 중요한 문화재들을 발굴했다. 특히 청주흥덕사지 발굴조사단장을 맡아 현재 청주시 운천동의 ‘청주고인쇄박물관’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기여를 했다.

충북도 방언연구를 시작으로 민속학에 발들 들여 놓은 김 박사는 영동과 보은 등 충북의 오지 구석구석을 다니며 현존하고 있는 구비문학을 발굴, 채록하는 등 현장조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한국정신문화원에서 출간한 ‘한국구비문학대계’ 중 ‘충북편 4권’이 결실을 보았다.

이를 토대로 충북도의 방언과 무가(巫歌), 농악, 종교 등 충북문화 전반에 걸친 21권의 단독저서를 비롯해 20권의 공저, 102편의 논문이 나오게 됐다. 충북의 문화를 발굴 정리한 ‘충북문화론고’와 충북 전역에 걸쳐 고서(古書)에 존재하는 지명에 관한 해설을 붙인 ‘충북역사지리사전’, 괴산군에 현존하는 시문을 모은 ‘괴산시문집’, 산신제와 동제 등 충북에 현존하고 있는 민속현장을 누비며 이를 복원하고 기록한 ‘충북민속의 현장’ 등이 대표적인 저서다.

충북의 민속을 연구하고 직접 현장을 누비며 기록해 왔던 김 박사가 ‘직지’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4년 청주대 박물관장 재직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청주대학교 박물관팀은 청주시 운천동 흥덕사지터 발굴 작업을 벌이던 중 우연하게 흥덕사 금구조각을 발견했으며 금구조각에 ‘갑인오월 일 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甲寅五月 日 西原府興德寺禁口壹座)’라는 명문의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글자를 본 김 박사는 마침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영인본이 흥덕사에서 주자(鑄字)로 찍어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된 현존 최고(最古)의 금속 활자본 ‘직지’(1377년 간행)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이후 김 박사는 당초 개발 예정지였던 현재의 흥덕사지터가 현재의 모습이나마 유지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는 데 주효한 역할을 했다. 흥덕사지 외에 중원미륵리사지 발굴조사단장을 맡아 중원미륵사지 발굴을 주도 했으며 충주대원사지 등 충북 곳곳의 다양한 향토문화유적지 발굴 작업에 참여 했다.

그는 퇴직 후 청주시 미원면 월용리 천변 ‘옥화대 마당소’에 터를 잡고 ‘학고산방(學古山房)’을 마련한 후 민속연구에만 매진했다.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무형문화재 기록화 사업이다. 특별히 귀하게 여겼던 청주농악은 보존회 회장을 직접 맡으면서 원형유지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청주농악이 1992년 충북무형문화재 1호가 되는데 앞장섰으며 2010년에는 농악의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 전승자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청주농악의 원형을 영구히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 청주농악 책자와 영상제작을 통한 기록화사업을 주도했다.

청주농악의 전통적 예능을 학술적으로 조사 연구 정리해 각 분야의 기능자들이 시연한 것을 영상물로 기록해 전승양상을 DVD로 제작한 것이다. 청주농악 책자는 ‘우리나라의 농악’, ‘청주농악의 배경과 내력’, ‘청주농악의 종류와 편성’, ‘청주농악의 놀이와 장단’, ‘예능보유자와 전수교육’, ‘청주농악보존회와 농악단’으로 구분해 382쪽 분량으로 제작 되었다.

김 박사는 교통통신과 과학의 발달로 지역적 특성을 지닌 향토 문화가 크게 변형되면서 본래의 모습이 변화되거나 사라지고 있는 무형문화의 기록을 중요하게 여겼다. 청주농악 외에 그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6호인 ‘영동 설계리 농요’다. 설계리농요보존회에 의해 완전한 형태로 구연되고 있는 설계리 농요 중 길쌈노래 발굴 작업에 직접 참여했으며 길쌈노래가 ‘영동길쌈노래’라는 이름으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해 문화체육부장관상에 입상한 바 있다.

이후 영동군은 설계리 농요의 전승과 보존을 위해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전수 사업 지원을 받아 ‘설계리 농요전수관’을 건립하게 됐다. 덕분에 영동지역의 농요가 비교적 완전하게 전수되고 있으며 김 박사가 ‘설계리 농요’ 기록화 작업을 진행했다. 제천의 ‘오티 별신제’와 진천 ‘용몽리 농요’ 기록화 작업도 이어 진행했다.

유형 문화재와 달리 형태가 없어 오직 기록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형문화재의 보존에 대해 김 박사는 특별히 원형(原形)이 아닌 고형(古形)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예로부터 해오던 재래의 전속 형태이기 때문이다. 민속예술경연을 통해 오히려 민속을 소재로 한 공연이 변형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그는 무형문화재 기록화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퇴직 후 충북도 무형문화재 기록화 사업에 매진한 이유다.

이번에 발간된 유고집 ‘충북문화사전’(태학사/ 3만5천원)은 무형문화재 기록화 사업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김 박사는 청주대학교 박물관장 재직시절 청주 흥덕사지 등 충북지역의 문화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옛 문헌자료, 특히 지리지를 자주 찾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충북역사지리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했지만 사전이 없어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마음으로 직접 작업을 시작했다. 마침 1998년 안식년을 갖게 된 김 박사는 조선시대의 지리지만 정리 한 것에 시군지와 유적조사서를 참고해 많은 부분을 보충해 넣어 향토사 연구에 참고가 될 만한 ‘충북문화지리사전’을 완성했다.

이 책에 대해 늘 아쉬움을 갖고 있던 김 박사는 퇴직 후 월용리 ‘학고산방’에 머물며 선사(先史)와 고고(考古)를 추가해 수정하고 보완한 ‘충북문화사전’ 원고를 집필한 것이다. 김 박사는 갑자기 병을 얻어 입원하기 직전인 2016년 10월까지 이 ‘충북문화사전’ 원고를 다듬고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충북문화사전’은 김 박사의 가족과 제자인 정종진 청주대 국문학과교수의 도움으로 빛을 보게 됐다. 컴퓨터에 정리된 원고를 확인하고 마지막 유고집으로 발간을 진행한 정 교수는 “강변에 터를 잡고 넘치는 열정을 차분한 연구를 통해 다스리고 계셨다”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원고를 보충하고 정리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충북문화사전’은 조선왕조실록, 대동여지도 등 고서(古書)와 각 지역의 시군지, 유적발굴자료 등에 등장하는 문화지리·지명 등을 현대인들이 알기 쉽게 고증해낸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황강역(黃剛驛): 청풍에 있다. <世地> 황강역(黃江驛)의 옛 표기’라고 설명돼 있다. 이는 현재 영동군 ‘황간역(黃江驛)’이라는 지명이 세종지리지에는 한자로 황강역(黃剛驛)으로 표기돼 있다고 설명한 것이다. ‘흥덕사’, ‘신륵사’, ’망이산성’ 등 각종 고서에 등장하는 지명과 ‘이상설 생가’, ‘이상연 정문’ 등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 묘와 정각, 비석, 정문(旌門) 등에 대한 지명 고증작업이다.

정 교수는 “이 같은 작업은 현대학자들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충북지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며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지, 충북향토사를 연구하고 찾는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선생님께서 고대 편을 해놓은 셈이니 나머지 근대와 현대에 새롭게 생긴 지명을 정리하는 일은 우리 후학들이 이어가야 한다. 이러한 자료가 없어 연구가 능률적이지 못했다. 앞으로 충북민속학 연구자들에게 좋은 근간자료가 될 것이다. 선생님께서 후학들에게 귀중한 선물을 남겨 주신 것”이라며 “선생님 곁에서 끝까지 함께 하셨던 가족 정은택 여사님께서 저술이 빛을 못 볼까 염려해 출간비를 지원해주셨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덧붙여 “충북민속연구의 커다란 근간을 마련했고 청주직지박물관 탄생에 기여한 선생님의 중요한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며 “직지박물관의 전문화 등 선생님이 고대했던 충북문화의 근원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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