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숙 수필가

스위스 루체른의 도심 한구석, 한적한 공원 절벽에 창을 맞고 죽어가는 사자의 조각상 하나가 누워 있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죽어가는 사자의 발 앞에는 부르봉 왕조를 상징하는 백합문양이 새겨진 방패가 놓여있다. 사자상 위에는 ‘HELVETIORUM FIDEI AC VIRTUTI’ 라는 라틴어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그 의미는 ‘헬베티아(스위스)의 충성심과 용맹함’을 뜻한다고 한다. 마크 트웨인은 이 사자기념비를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바위”라고 묘사를 했다.

‘빈사의 사자상’

프랑스 혁명 당시 튈르리궁으로 진격하는 군중에 대항해 끝까지 남아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와네뜨를 지키다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국왕을 지키던 프랑스 근위대마저 모두 도망친 상황이었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한명도 이탈하지 않고 혁명군에 맞서 왕을 지키다 전원 전사 했다. 용병을 고용한 루이16세가 “그대들은 이제 철수해도 좋다”라고 했지만 한명의 이탈자도 없이 끝까지 왕의 곁을 지켰던 것이다.

자국의 왕도 아닌 더구나 철수 명령을 받았음에도 그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바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병사의 주머니에서 나온 유서에서 그 궁금증이 풀렸다.

만일 자기가 신의를 저버리고 도망친다면 후손들 역시 신의를 잃어 용병으로서 일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라 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지대인 스위스는 별다른 수입원이 없었기에 타국에 용병으로서 전장에 나가는 것만이 유일한 수입이었던 것이다.

스위스 용병이 타국의 전장에서 신의를 지키는 이야기는 이 말고도 바티칸 교황청 근위대의 이야기 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그러기에 바티간의 근위대는 지금까지도 오직 스위스 미혼 남성 중에서만 선발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뒤로하고 스위스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전 세계 1위를 차지한다. 리기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루체른 호수 주변의 그림 같은 풍경들은 그 말을 충분히 뒷받침하고도 남을 만 했다.

한국어 교사인 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종종 한글의 위대함에 감탄을 하게 된다. 자음과 모음의 과학적인 결합으로 쉽게 익힐 수 있음은 물론이고 미세한 표현어휘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문장들은 무궁무진하다. 덕분에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은 자신들이 어학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쉽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착각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인들의 문맹률이 낮은 이유도 한글의 위대함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조상을 잘 둔 민족임에 틀림없다.

5남매를 성장시켜놓은 우리 엄마는 옛날 어렵던 시절 이야기를 종종 하신다.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생이지만 지금 우리 형제들이 불편함 없이 살고 있는 것은 부모님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세대의 희생과 노력이 낳은 결과는 후세대의 안위에 큰 영향을 줌에 틀림없다. 단지 발전이라는 쉬운 단어로 뭉뚱그려져 버린 희생의 결과를 우리는 너무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계 디자인업계가 가장 탐내는 디자이너 문승지는 한글을 ‘가까이 있어 보이지 않던 소중함’ 이란 의미로 담아냈다.

행복지수 전세계 1위, 사회복지 수준 4위의 스위스 국민들은 용병으로 죽어가며 후손의 안위를 걱정하던 조상을 얼마나 기억할까?

당연함으로 사용하는 우리 국민들은 한글의 소중함을 얼마나 인지하며 살고 있을까?

수련이 소박하게 핀 연못 위를 내려다보는 빈사의 사자상은 여전히 창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얼굴이다. 힘없이 늘어뜨린 한쪽 발이 후손들을 위해 끝까지 신의를 지키며 죽어가는 용병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숙연함마저 들었다.

7월의 태양아래 연꽃은 무심히도 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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