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해피마인드 아동가족 상담센터 소장

친한 관계에서 거절은 어렵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믿고 있을수록 서로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이상해’라고 말을 해도 ‘내’ 귀에는 ‘내’ 눈에는 안 들리고 안 보인다.

우리는 의존할 대상을 본능적으로 찾는다. 누군가와 친밀하게 혹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인식되면 불안감은 덜하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사랑할 대상이나 집착할 대상이나 시간을 함께 소비할 대상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세상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기술 중 대인관계기술과 양육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이 두 기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결국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고, 이 소속 집단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혼자서 아무리 잘해도 그것이 소통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또 다른 갈등을 부르며, 고통의 지점을 낳기 때문이다.

또한, 부모라면 양육기술 습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가족 관계는 대인관계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가깝게 자신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관계이며, 상대의 가장 내밀한 곳도 볼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일로 만나는 관계라면 무슨 걱정이겠는가? 받은 만큼 기준만큼 하는 되는 관계이고 그리고 힘들면 안 보면 되는 관계지만, 가족 관계는 그럴 수 없기에 감정의 기준을 정하기가 어렵다.

친밀한 관계에서 보면 지나치게 헌신하는 누군가로 인해 그 관계가 유지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한 헌신을 받은 대상은 좋을 수 있다.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착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자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여 상대를 통제하려는 무의식적인 의도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상대가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자신을 돌보고 성장할 기회를 아예 박탈해 결국 무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지나친 헌신은 상대방을 지배하고 자는 욕망의 숨은 얼굴이라 할 수 있다.

관계는 언제나 힘의 연장선에 있다. 한사람이 고정된 역할만 한다면 고정관념을 낳고 제한된 행위를 낳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 역할 고정관념이다. 서로 고정관념에 묶일 때 소통은 단절되기 쉽다. 지금 당신이 누군가의 헌신을 받고 있다면 상대의 노동을 인정해야 한다. 노동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사실 물질적인 보상으로만은 아니다. 관계 노동에 대한 대가가 적절하게 지급되지 않을 때는 결국 그 관계는 깨지고 만다.

친밀한 관계에서 경계를 갖는다는 것은 진정한 자기로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 질문이다. 스스로 자신의 욕구를 책임지고 있는가이다. 그 욕구의 해소가 상대를 통해 충족될 수 있는 것이라면 상대에게 그 욕구를 표현할 수 있는가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게 거절할 권리를 줄 수 있는가이다.

자신의 욕구를 읽는다고 하더라도 상대에게 그것을 표현하기는 어렵다. 상대가 거절할까 봐 그 거절의 상처를 미리 생각하기에 욕구를 제압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즉, 공격적인 말투, 비난, 꾸중, 비웃음, 상대방의 인격을 ‘깔아뭉개는’ 말, 욕지거리와 협박으로 자신의 욕구를 돌려서 사용한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서로에게 주어지는 여백이 필요하다. 자기로 온전히 서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자기로 서 있지 못한다면 결국 그 책임을 상대에게 던지게 되며,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과잉노동을 부를 수밖에 없다. 관계 노동에도 휴식시간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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