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쌉쌀하면서도 향긋하다. 봄을 먹는다. 봄이 입 안에서 춤을 춘다. 겨우내 묵은 향내로 텁텁했던 입이 호사를 누리는 순간이다. 더불어 내 안의 침잠했던 오감들이 깨어나고 있다.

자연에서 채취한 취나물은 보송보송한 솜털이 미세하게 덮여 있어 약간 까슬까슬하고 육질은 씹는 맛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너무 억세지도 않고 무르지 않아서 좋다. 향기 또한 독특해 입맛을 돋우기에 그만이다. 조리방법도 간단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맛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간만 하면 된다. 숨만 죽도록 살짝 데친 뒤 깨소금, 참기름, 소금 약간을 넣고 조물조물 무친다. 그렇게만 해도 맛깔스럽기가 그만이고 담백하다는 표현에 딱 어울리는 맛을 낸다.

음식을 하다보면 갖은 양념을 해야 하는 것들도 있고 별다른 양념을 하지 않아도 나름의 맛을 내는 것들이 있다. 맛있게 만들어 보겠다는 선한 욕심에 이것저것 향내 나는 부재료를 첨가하다보면 주재료가 가지고 있는 맛을 훼손하기도 한다. 자연주의를 지향하는 요즘 세태에 각광을 받는 것은 아무래도 자연그대로의 것들이 사랑을 받지 않나싶다. 그러다보니 맛을 이야기 할 때마다 등장하는 말이 담백하다 이다. 맛 칼럼니스트라고 하는 이들이나 맛 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음식을 입에 넣어 씹어 보기도 전, 제대로 맛을 느낄 새도 없이 입에 들어가기만 하면 으레 “참 담백해요”라고 말하는 걸 본다. 좀 어이없어 지기도 하지만 아무튼 담백하다는 말이 음식의 맛과 품격을 좌우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취나물은 담백한 음식이라 해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

담백하다는 말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음식에서는 느끼하지 않고 산뜻하다는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은 아마도 각각의 재료마다 본래의 맛과 향취가 있을 터, 이를 훼손하지 말고 조리한 음식에서 느낄 수 있는 맛이 아닐까 싶다. 첫 입맛엔 좀 무덤덤한 것 같지만 먹을수록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맛을 내는 것이고 자연의 맛으로 돌아가기 위한 첫 걸음이 아닌지 모른다.

담백하다는 말을 사람에게 적용했을 때엔 욕심이 없고 깨끗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굳이 생각해 본다면, 오래 머금을수록 은은한 사람, 허세와 오지랖대신 배려 할 줄 아는 사람, 척하지 않는 사람 등을 일컬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먼 길이 아닌가 싶다. 깊게 들여다보면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데서 걸린다. 욕심의 종류는 참 많기도 하다. 물욕, 명예욕 성욕, 식욕(식탐), 등을 위주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런 것들을 자제하지 못해 사악한 마음에 빠지게 되고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에 의해 수치를 당하기도 한다. 요즈음 청문회 현장만 봐도 그렇다. 털면 털수록 먼지가 나고 악취가 진동하는 걸 보면 사람에게서 담백함을 찾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욕심에 초연해야 맑은 사람이 될 수 있으련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욕심의 거울에 비친 나는 어떠한가. 아예 가진 게 없으니 물욕과는 거리가 멀고 명예욕에는 좀 취약하지 않나싶다. 내 안에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소속된 이곳저곳에서 처해 있는 상황을 보면 전혀 부인할 수많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또 다른 하나는 곱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는 욕심이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줄을 긋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백화점 쇼윈도에 걸려 있는 날개 달린 보랏빛 실크 원피스에 마음을 빼앗겨 서성이곤 하다가 누가 볼까봐 커닝하다 들킨 학생모양 화들짝 놀라 그 자리를 떠나곤 하는 자신을 보며 어이없어 선웃음을 웃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아무리 강한 햇볕이 내리 쬐어도 녹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흰 서리를 한 광주리 이고 있으면서도 좀 더 고와지고 싶은 욕심에서 놓여나지 못하니 어찌하면 좋을까. 누군가 나이 들어가는 것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던 말이 생각난다. 나이 듦에 순응하며 곱게 익어 갈 수 있다면 이 또한 담백함에 한 발짝 다가서는 길일지도 모른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군더더기 없이 주제를 살려가며 쓰데 건조하지 않아야하고 운율이 살아 있어 읽는데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선 무엇이 군더더기인지 알 수가 없고, 불필요하다 싶어 이것저것 잘라내다 보면 맛이 없는 것 같아 다시 주어다 늘어놓기 일쑤다. 짧은 글 한 편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다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인지 쓰는 자신조차 알지 못할 때도 있으니 읽는 독자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랴.

세상의 모든 사물들, 생명이 있는 것들에서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태어나고 만들어지는 순간에는 담백함을 넘어선 순수의 결정체이었을 게다. 이 모든 것들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다보니 온갖 것들이 덧입혀지고, 머리가 커지고 커진 머릿속에는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들이 뒤섞여 분별력을 잃게 되고 결국에는 순수함은 사라지고 담백함에서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담백한 음식, 담백한 사람, 담백한 글 등 담백하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것들,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맛과 멋과 품위를 잃지 않은 것들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