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숙 수필가

“거 좀, 벨 좀 빨랑 눌러 주시요!”

“거참! 가만히 좀 계쇼. 어련히 알아서 눌러줄까! 저 모퉁이 돌면 눌러 줄 낀데! 어지간히도 보채 쌌네!”

“아니, 안 서고 지나가면 어짤라고 그러요!”

버스 안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허리가 바닥에 닿을 듯 꾸부정한 할머니가 또 다른 할머니에게 하차 벨을 대신 눌러 달라고 부탁하는 듯했는데, 이제는 서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지금 누르면 전기가 더 든단 말이요!”

전기 낭비된다는 말에 말문이 막혀버린 할머니는 “내 참, 버스 벨 미리 눌렀다고 전기 더 든단 말은 내 머리털 나고 처음 듣네. 쯧쯧….”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간신히 하차하며 혼잣말처럼 구시렁댔다.

손주 줄 선물인지 꽃분홍색 이불을 힘겹게 끌어안고 앉아있던 할머니는 차창 밖에 대고 “요즘 전기료가 얼마나 비싼데! 돈 아까운 줄도 모르는 할망굴쎄.” 다들 들으란 듯이 목에 힘주어 큰소리를 내었다.

“얘야, 불 좀 끄거라!”

신혼 시절, 빈방에 불이 켜져 있을라치면 어디선가 바람처럼 나타나 불을 끄시던 시어머니.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사셨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엄니, 형광등을 그렇게 짧게 켰다 껐다 하면 오히려 전기료가 더 많이 나온대요.”

남편의 볼멘소리에 어머니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에고, 정말, 그렇대? 미처 몰랐네.” 끄덕끄덕 수긍하시는 듯해 살짝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며칠 잠잠하던 어머니의 소등에 대한 집착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우리 내외가 불을 켜 둔 채 잠시라도 방을 비울라치면 휙 나타나셔서 “방을 나설 땐 바로바로 불을 꺼야지.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물 쓰듯 하면 되겄냐? 그게 다 아범 호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인데! 젊은 애가 벌써부터 그리 건망증이 심해서야 어디 쓰것냐?”

은근히 자식 사랑까지 내세우는 어머니 앞에서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결혼 후 시댁에 들어오니, 화장실 한구석을 차지한 반자동 금성 세탁기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누런빛의 이 커다란 덩치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친정에는 없던 가전제품이요, 그 당시에는 보기 드문 물건이었다. 말로만 듣던 세탁기를 쓰게 되다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러나 다가가 살펴보니 그 녀석은 비닐로 칭칭 야무지게 동여매져 있었다. 어머니는 전기료 많이 나온다며 아예 손도 대지 못하게 하셨다. 날마다 쌓이는 빨래들은 일일이 손세탁을 해야 했다.

어느 날 시고모님이 나들이 오셔서 어머니 허락도 없이 세탁기의 비닐을 벗겨냈다. 시누이들도 응원을 보탰다. 그러자 마지못해 응한 어머니는 이번엔 물을 가지고 엉뚱한 고집을 부리셨다. 물 낭비를 막겠다며 세탁기 호수를 수도에 연결하는 대신 양동이로 물을 길어다 부으라 하셨다. 세탁기 수조는 마치 밑 빠진 독같이 느껴졌고, 오히려 세탁기 시중까지 들게 된 나는 두 손 들고 말았다. 방치해 둔 그 세탁기는 제대로 작동 한 번 못하고 어찌 된 일인지 고장이 나고 말았다. 애물단지가 된 세탁기가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고 끙끙대었다. 저녁마다 어깨며 손마디가 저리면 은근히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다.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자 전자동 세탁기를 들여놓았다. 저 혼자 척척 빨래를 해대는 세탁기가 대견해 몰래 쓰다듬기도 했다. 하지만 눈길도 주지 않으시는 어머니의 반응이 걱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는 여전히 손빨래를 주장하셨다. 세탁기 작동법을 알려드리려 해도 외면하셨다. 알고 보니 어머니는 그 물건이 마치 물과 전기를 마구 잡아먹는 징그러운 괴물처럼 느껴져 싫다고 하셨다.

분가한 후 어느 저물녘에 슬며시 시댁에 들렀다. 아이들 웃음이 떠나간 집은 괴괴하게 느껴졌다. 일찍 저녁을 드신 시부모님은 안방의 텔레비전만 켜 둔 채 빈집처럼 앉아 계셨다. 마치 커다란 관속에 두 분이 들어앉아 계신 것처럼 섬뜩하게 느껴졌다. 내가 들어서자 화들짝 놀라시며 황급히 불을 켜셨다. “왜 이렇게 깜깜하게 하고 계셔요?” 투덜거리는 내게

“둘만 있는 집에 무슨 큰일 났다고 불을 환하게 켜 놓겠니. 애들이나 있으면 모를까! 괜한 걱정 말아라. 암시랑도 않다.” 괜스레 계면쩍어 허둥대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눈에 밟혀 온다.

108년만의 무더위가 몰려온 지난 여름. 가만히 서 있어도 숨통이 막힐 것만 같았다. 에어컨을 온종일 가동해도 역부족이었다. 물 쓰듯 써재낀 탓에 전기료 폭풍이 걱정되어 슬그머니 통장 잔액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즈음 서민들의 원성이 잦아지자 정부는 두 달간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세를 조정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혜택은 체감하기 힘들었다. 더위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건만 새삼 가슴이 타들어 갔다.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지청구에 지쳐 이마의 주름이 더 깊어지셨을 것이다.

“땅을 파 봐라.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제발 불 좀 끄고 아껴 써라.” 시어머니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지금은 어머니 대신 남편이 각 방의 불을 부리나케 끄고 다닌다. 그때마다 투덜거리는 아들과 딸의 원성도 장단을 맞추듯 터져 나온다.

“아빠, 언제 오셔서 번개처럼 불 끄셨어요! 잠깐 화장실 갔다 온 건데!”

“인마! 방 비울 때는 불도 비워줄래? 우리가 무슨 석유 재벌이냐!”

좁쌀영감이 다 되었다. 남편은 이제 어머니보다 한술 더 뜬다. 나도 이에 질세라 한소리 거든다.

“얘들아, 불 좀 바로바로 꺼라, 이게 다 네 아빠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거야. 자꾸 잊어버리지 말고 제발 전기 좀 아껴 쓰자!”

나는 어느새 어머니의 말투를 똑 닮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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