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해피마인드 아동가족 상담센터 소장

 

친구가 발레를 시작했다고 했다. 발레를 하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이 너무 예뻐서 퇴근하기가 무섭게 발레학원으로 달려간다고 했다. 같은 여고를 다닐 때 그 친구의 별명은 ‘올리비아 핫세’였다. 물론 이 별명은 친구 모르게 내 안에서 불린 이름이었다. 그만큼 내 눈에 비친 그녀는 예뻤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춤을 배우겠다고 결심한 친구가 나는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몸에 대한 관심을 둬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나는 몸으로 무엇을 하는 것에는 인색하기에 친구의 그 결정이 부럽기만 했다.

나는 열등감이 많은 사람이었다. 특히 몸에 대한 열등감이 컸다. 사춘기를 시작으로 자의식이 생겨나면서부터 나는 내 안에서 살고 있는 열등감을 확실하게 알게 됐다. 그리고 무의식에 깊게 뿌리내린 열등감을 만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써야 했다.

친구가 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나도 춤을 추고 싶다. 리듬에 맞게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다’였다. 몸을 영혼의 집이라고 한다. 집이 피폐해지면 정신이 돌아올 곳이 없다고 한다. 그 정신을 실현한 물질이 없다고 한다. 몸과 정신을 분리하는 작업은 오랜 이분법적 사고에서 유래됐기에 정신의 작용을 몸의 작용보다 우위에 둔 세월도 길었다. 오히려 지금은 몸이나 외모에 너무 큰 비용과 시간을 쓰지만 말이다.

어쩌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오랜 열등감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자신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긍정화하며, 오히려 그 조건을 동력으로 삼아 굳건하게 자신을 직면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열등감은 마주하면 할수록 힘이 약해진다.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기에 많은 관계와 상황에 놓여서 살아가기에 우리는 수시로 열등감을 느낀다. 이는 끊임없이 상대와 나를 비교하는 하게 데에서 나오기도 하며, 불가피하게 타인의 눈으로 본,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일어나는 감정이기도 하다.

친구는 연말에 같이 발레는 배우는 사람들과 공연을 한다고 했다. 부끄러워하며 친구는 자신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기대된다고 했다. 자신의 몸 안에 그토록 많이 쓰지 않은 근육이 있다는 것이놀랍다고 했다. 자신의 몸 안에 있는 근육들이 하나하나 반응을 보이며 서로 협응할 때의 경이로움에 대해 친구는 말했다. 멋졌다. 댄싱퀸은 나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자, 한없이 감탄사를 날리는 대상이기도 하다. 자유롭게, 자신을 개방하듯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냥 사랑하고 싶어진다. 올 여름 나도 댄싱퀸에 도전해 보려한다. 아바(ABBA)의 댄싱퀸(Dancing Queen)이란 곡에 맞춰 몸이 원하는 방향대로 나를 맡기며 나를 자유롭게 놓아두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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