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훈 청주시 서원구 세무과장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생일이나 어버이날이면 알록달록 편지지에 또박또박 쓴 손 편지를 건네주곤 했다. 내용은 대충 어제를 반성하고 물질로 선물할 수 없는 오늘을 안타까워하며 내일을 향한 결연한 다짐으로 마무리 되곤 했다.

그 후에도 아이들은 연례행사처럼 선물을 대신한 편지글을 쓰곤 했는데 비록 공약(空約)일지라도 아이의 진정어린 마음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니 마냥 행복한 기억으로 추억된다. 

큰 딸아이가 학업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시작할 무렵 재학 때 대부받은 학자금의 상환통지서를 받고는 아이 방문에다 붙였다. ‘취직했으니 제가 갚을게요’할까? 반응이 궁금했다.

저녁에 퇴근해 돌아온 딸아이는 자기 방문에 붙여진 종이를 스윽 읽더니 한 치의 망설임 없는 항의조로 “이게 왜 내 방문에? 교육비용은 부모님 몫이니 저에게 부담주지 말라”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아니 그냥 알고만 있으라는 건데….” 말끝을 흐렸다. 

얼마 전, 올해까지 두 딸아이가 짝을 이루고 처음 맞는 남편 생일날이었다. 아이들은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한답시고 나름 숙고를 한 모양이다. 행사는 지난해와 별반 다름없는 식사와 포장선물, 금일봉 등 의례적인 내용으로 꾸며졌고 색다른 점은 아이 셋이 저마다 축하메시지를 담은 동영상 파일을 휴대폰에 넣어줬다. 

영상 속에서 두 딸 내외는 “생신 축하드려요. 사랑해요. 효도하면서 잘 살게요. 건강하세요.” 대략 이런 내용들로 아주 상냥하고 착한 목소리로 효심을 보여줬다.

그러나 어릴 때 후하게 남발했던 크루즈여행 등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약속은 없었다. 그래도 막내인 대학 2학년생 아들이 “아빠 차 바꿔드리고 싶은데 지금은 능력이 안 되고 나중에 돈 벌어서 좋은 차 사드릴게요”한다. 비록 공약(空約)이 될지라도 아이의 후하고 귀여운 약속이 아직은 더 반갑고 기분이 좋다.  

그런데 한 번은 저녁 늦은 시간에 막내아이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다. 아이의 기운 없는 목소리에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오늘 하루 힘들었는데 엄마 목소리 듣고 힘내려고 전활했단다. 반가운 마음에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엄마카드 쓰라고 했더니 ‘네, 엄마 고맙습니다’ 마무리 멘트가 끝나자마자 휴대폰에서는 띠링! 치킨 한 마리가 카드결제 되고 있었다. ‘아아~ 그래도 치킨보다는 엄마였을 거야’ 믿고 싶다.

며칠 전 한밤중에 쥐어짜듯 배가 아파 밤새 통증에 시달렸던 적이 있었다. 장에 탈이 나 혼자서는 병원도 못갈 만큼 아픈데도 기진맥진 혼자 감내했다. 누군가 걱정한다고 덜 아픈 것도 아니고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떨어져 있는 가족이나 주변에서 물어오면 괜찮다 했다. 아마 자식의 마음이, 자식에게는 부모 마음이 이런 게 아닐까?

연례행사처럼 생일날이라도 ‘나중에 효도할 게요’란 말을 할 수 있고 또한 들을 수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을까? 욕심을 내리고 곱게 문자를 날린다. ‘얘들아! 아프지 말거라. 그거면 됐다’ 이번 주말에는 엄마랑 단 둘이 드라이브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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