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숙 수필가

더운 바람을 몰고 온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가고 난 신작로는 질척거리는 진흙과 흙탕물 웅덩이를 드러내 놓아 그렇잖아도 심드렁한 내 심기를 더욱더 뒤틀어 놓았다.

끈적거리는 여우비까지 오락가락해 마땅찮은 비닐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려니 집으로 돌아가는 발길은 바윗덩어리를 매단 듯 무겁기만 했다.

이런 날은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집에 가봤자 엄마도 안 계실게 뻔했기 때문이다. 담배 밭고랑에 들깨 모종을 하러 가셨거나 논두렁에 콩 모종을 하러 가셨을 것이다.

비에 흠씬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은 엄마의 얇은 옷을 보는 것도 과히 기분 좋지 않았고 파머가 다 풀려 생머리가 되어버린 머리칼을 수건으로 끌어올려 묶은 엄마는 나이보다도 훨씬 더 늙어 보여 속상했다.

멋진 옷에 화사하게 화장도 하고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반갑게 맞아주면 좋으련만 그건 소망일뿐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언니들은 시내에서 자취를 하니 주말이나 돼야 올테니 일찍 집에 들어가봐야 날 기다리는 것은 할머니의 잔소리일게 뻔했다.

마을 입구에서 되돌아 나와 저수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단골 소풍지였던 곳이다. 하얀 토끼풀 꽃이 비단처럼 깔려있는 둑방엔 눅눅한 바람만이 이따금 불어올 뿐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이 적막했다.

간간이 뿌려대던 여우비도 그치고 야속한 6월의 태양만이 내리쬐고 있었다. 저녁때쯤이나 되어서 들어가리라 마음먹고 토끼풀을 요 삼아 누웠다. 하늘 한 가운데에는 흰 구름이 어디론가 부지런히 흘러가고 있었다. 세월도 저 구름처럼 빨리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얼른 어른이 되어야지’ 군데군데 소똥이 말라붙어 파리떼가 엉겨 붙어있는 적막한 골목, 발밑에 한 줌씩 달라붙는 진흙들은 왠지 내 삶을 징그럽게 붙들고 늘어질 것만 같아 싫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마주치는 똑같은 얼굴들, 구리 빛 그 칙칙한 얼굴들에선 삶의 희망이라든가 미래 같은 것은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우울함과 답답함만이 느껴졌다.

“시골이 그렇게 싫으면 열심히 공부 하렴”

딸들에게는 시골 생활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엄마는 공부하란 말을 달고 사셨고 사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는 방법은 열심히 공부해 시내로 진학하는 길밖에 없었다.

두 언니는 이미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고 이제는 내 차례가 되었다.

이런 조급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는 나만 보면 잔소리에 여념이 없으셨다.

“마루 좀 닦아라”

“마당 좀 쓸어라”

“할아버지 흰 고무신 좀 개울에 가져가 닦아 와라”

계집애들 공부 시킨다고 대처로 내보낸 며느리가 맘에 들지도 않았지만 대도 못 잇는 계집애들 신주단지처럼 떠받든다며 구박을 하는 할머니의 시집살이에 간혹 눈물을 훔치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지루한 나날 중에서도 하루에 몇 번 미루나무 가로수를 지나가는 서울행 하늘색 직행버스를 보며 나도 언젠가 저것을 타고 얼굴 하얀 이들이 사는 그곳으로 가리라 굳게 다짐을 했다.

내 어릴적 꿈은 그것이었다.

그 산골을 떠나는 것.

세월이 흘렀다.

6월의 바람은 여전히 눅눅했고 여우비도 뿌려댔다. 얼굴에 화장을 하지 않아도 새하얀 얼굴을 갖게 됐고 아무리 비가와도 발밑에 흙 한 톨 묻지 않았다. 비 오는 날에도 비에 젖은 엄마 옷을 보지 않게 되니 속상한 마음도 사라졌다.

내 소망이 그랬던 것처럼 예쁜 옷에 화사하게 화장도 하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내 아이들에게 간식을 챙겨주기도 한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그 우울함에서 벗어난 뒤로 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잊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마음속에 눅눅한 바람이 불어왔고 알 수 없는 풀냄새가 풍겨오는 듯 했다. 구리 빛 얼굴들이 하나둘씩 그리워졌다. 저수지가에 수북이 자라던 이름 모를 물플들이 눈을 감을 때면 떠오르고 돌담아래 말라가던 쇠똥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여름 소나기라도 퍼붓는 날엔 밭고랑 사이에 쓸쓸해 보이던 엄마의 뒷모습과 앞섶사이에서 풍겨오던 땀 냄새가 그리워,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여우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구멍 난 비닐우산 받쳐 들고 다시금 산골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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