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희 수필가

꽃씨를 뿌렸다. 지인이 선물로 주었는데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잊었던 봉선화 꽃씨다. 거름과 흙을 고루 섞어 씨앗을 심고 치자 화분 옆에 나란히 놓아두었다. 며칠이 지나고 치자 꽃이 쏟아내는 수다로 꽃향기가 가득하던 날, 시샘이 났던지 봉선화 화분에서도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갓난아기의 발가락처럼 꼬물거리며 잎을 틔우더니 며칠 사이에 큰 화분이 수북해졌다.

생전 처음 씨앗을 뿌리고 싹이 올라오는 걸 보니 가슴 뿌듯했다. 남편은 화분 가득하게 올라온 어린싹을 솎아주어야 튼튼하게 자란다고 했지만, 아까운 마음에 몇 포기만 뽑아냈다. 볕이 좋아서인지 봉선화 싹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더니 어느 날 인가부터 화분에서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닥다닥 붙어 자라던 싹이 구부러지고 넘어졌다. 남편의 말을 흘려듣고 솎아주지 않아 영양가 없이 키만 웃자란 줄기가 얽히고설킨 것이다.

농작물을 심을 때 식물 간의 거리, 포기 사이의 거리를 유지해주는 것을 재식거리라고 한다. 아무리 품종이 좋은 씨앗이라도 식물 사이의 거리가 지켜지지 않으면 작물이 부실해진다고 한다. 그 때문에 농사짓는 사람들은 농작물 심는 거리를 꼭 지켜야 한다고 한다. 이제 생각하니 어릴 때 집 앞 텃밭에 남새가 자라면 어머니가 일삼아 솎아 주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솎아주어 듬성듬성하게 남은 봉선화 줄기가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그 모습을 보니 친하게 지내던 친구 때문에 마음고생 했던 일이 생각났다. 이젠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얼굴이 봉선화 줄기 사이로 언뜻언뜻 스쳐 지나갔다.

20여 년 전 청주로 이사와 우연히 고향 친구를 만났다.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지만, 친하게 지낸 것은 아닌데 타지에서 동창을 만나니 반가웠다. 남편의 고향이긴 해도 모든 것이 낯설고 서먹서먹하기만 한 나한테 고교를 졸업하고 청주에서 터를 잡았다는 그녀는 유난히 친절하게 다가왔다. 기억에도 없는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추며 그녀는 나를 아주 친한 친구처럼 챙겨주었다.

낯선 도시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것만도 위로가 되어 우린 자주 만났다. 어렵게 생활하면서 7년 동안이나 시아버님 병간호까지 했다는 그녀는 너울가지가 있어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늘 우울해하다가 친구를 만나 활기를 찾아가니 남편도 그 친구를 고맙게 여겼다.

그녀를 만난 지 1년이 지날 무렵 그녀는 계를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돈계는 해본 적이 없어 망설이는 나한테 언변 좋은 그녀는 며칠 동안 나를 설득했다. 새로 시작하는 계에 계원이 한 명 부족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수익률도 은행이자보다 높고, 친구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끝 번호를 선택하는 것으로 계를 들었다.

1년짜리 계에서 마지막 한 번만 더 내면 내가 곗돈을 타게 되던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돈이 필요하니 빌려달라고 했다. 퇴근 후라 다음 날 아침에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당장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녀와 같이 현금인출기가 있는 은행에 가서 돈을 빌려주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그녀가 계원들이 부은 곗돈을 가지고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녀 남편은 내가 친한 친구이니 나한테는 말을 하고 떠나지 않았을까 싶어 연락했다고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가슴이 떨리고 기가 막혀 며칠 잠 못 들며 고민했다. 남편 모르게 든 계라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생각도 나지 않고 혼자 가슴앓이를 하다가 생병이 났다.

하루하루 수척해지는 내 모습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던 남편의 채근에 결국 그녀와의 일을 털어놓았다. 쓸데없는 일 벌여서 마음고생 한다고 핀잔을 줄 것 같았던 남편은 뜻밖에도 빨리 잊어버리라고 했다. 그렇게 말해주는 남편이 내심 고마웠지만, 월급 타서 꼬박꼬박 갖다 바친 돈을 생각하면 속이 아팠다.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다툼은 마음 거리를 조정하지 못해 생긴다. 서운함과 상처도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한테 받는다. 그녀와 나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너무 가까이 갔다. 만약 내가 그녀에게 마음을 모두 내보이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큰 상처를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봉선화를 키우며 인간 사이에도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일이 있고 나서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너무 가까이 하지 말자는 나만의 작은 규칙을 세웠다.

예순을 바라보는 지금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녀도 가끔 내 생각을 할까. 그 일이 있고 나서 한 번도 그녀를 본 적이 없지만, 친구를 통해 그녀가 동창회에 나온다는 말은 전해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야속한 마음 한편으론 오죽하면 어린아이들까지 두고 집을 나갔을까 싶어 그녀의 심정도 이해가 됐다. 그러나 한 번만이라도 용서를 구했거나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이라도 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해 두 번이나 솎아내는 실수를 했지만, 봉선화 줄기에 매달린 잎사귀가 아주 실하다. 구부러지고 엉켜 잘 자라지 못할 것 같았던 줄기에도 새잎이 돋고 꽃을 피웠다. 그렇게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나 꽃을 피운 봉선화처럼 나도 친구에게 먼저 손을 내밀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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