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엄기호 청주시 흥덕구 세무과 지방소득세팀장

지천명에 병을 얻었다. 대학병원에서 시술을 마치고 수납을 한다. 영수증이 복잡하다. 어쨌든 내가 낸 금액은 몇 십만원 뿐이다. 건강보험제도 덕분이다. 실손보험이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건강보험제도가 있어 참 다행이다.

쥐꼬리에 비유되곤 하는 공무원 급여로 자그마한 아파트 하나 장만했다. 아이들 둘 대학공부 시키고. 연금과 보험이라는 보장제도 덕분에 28년간 근근이 마련한 집 한 채를 온전히 지키며 살 수 있게 된 셈이다. 게다가 제대로 된 일자리조차 얻기 힘든 시절을 사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았으니 그것도 다행이다.

젊은 한 때 잘 나가던 대기업이나 사업가 친구를 보면서 부러웠다. 그럴 때면 복권이라도 사볼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당첨자를 두 번이나 배출했다는 로또매장에는 늘 길게 줄이 이어져 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도 그 줄에 끼고 싶은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어쨌든 내 주변에는 복권 당첨돼서 여유 있고 복된 삶을 산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그것도 다행이다.

내가 28년간 몸담고 일해 온 행정은 무엇과 같아야 할까 생각할 때가 있다. 거창하게 헌법이나 행정학 교과서를 들먹이지 않고 생각해 봐도 행정은 복권이 아니라 보험이다. 복권은 여러 사람에게 돈을 거둬서 운 좋은 한 두 사람에게 대박을 안겨 준다. 보험도 여러 사람에게 돈을 거두기는 하지만 예기치 못한 위험을 당한 사람에게 지급한다. 갑작스러운 위험으로 생활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을 막아 준다. 그렇다고 보험금을 받아 부자가 되지는 않는다. 손해를 메우는 한도면 족하기 때문이다.

사회보장제도라고 불리는 공적 보험은 연금과 건강을 넘어 실업과 산업재해까지도 담보한다. 최근 들어서는 기본소득보장을 논의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든 국민에게 월 300만원 또는 월 70만원의 소득을 보장한다는 제도다. 얼핏 생활광고지의 구인란 광고 문구를 연상하게 한다. 심지어 미국의 어떤 주에서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우리 돈으로 1억원에 가까운 돈을 지급하는 제도를 시범적으로 시행해 본 일도 있다. 우리 사회도 기초노령연금을 시작으로 이런 논의와 시도가 본격화 하고 있다.

보험이 진화하는 것처럼 행정도 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먹는 물처럼 기초 생활을 보장하는 분야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의료처럼 한정된 분야만 관장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공기업을 설립해 산업단지를 개발하고 분양한다. 지역특산품 가공회사를 우회적으로 설립해서 운영하기도 한다. 산업을 발전시키고 지역 주민의 소득을 높이는데 기반만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나서기도 한다. 사회적 기업 등 일정 기업에는 엄청난 특혜를 주기도 한다. 심지어 세제혜택은 물론 각종 편의제공을 약속하며 기업을 유치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소외된 사업가들은 역차별을 느끼기도 한다. 발 빠르게 지원제도를 잘 활용해 성공한 사업가들은 그만큼 사회에 환원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시민들도 많다.

공모 제도를 통한 사업시행에는 계획서를 꾸밀 줄도 모르는 취약계층이 오히려 사업에서 배제되는 역기능을 한다고 걱정하기도 한다. 낙수효과란 말은 화려한 포장지에 불과하다고 조롱한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숨 가쁘게 업그레이드되는 것처럼 사회보장제도나 행정도 그 변화를 따라잡기에 힘이 부친다. 선거 때마다 국민들은 첨단 학문의 주제에 대해 엄청난 공부를 해야 한다. 그 복잡한 와중에도 꼭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행정은 보험과 같아야지 복권은 아니라는 점이다. 가난한 사람의 호주머니를 털어 복지를 한다거나 발 빠른 몇몇에게만 대박을 안겨주는 포장만 그럴싸한 제도는 안 된다. 행정은 결코 복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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