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철 아동문학가

시집간 딸이 부탁한 물건을 찾기 위해 옥상 창고에 갔다. 이사 올 때 창고정리를 깔끔하게 했는데 그 동안 여러 사람이 만지다 보니 또 뒤죽박죽이다. 물건을 찾기 위해 이 상자 저 상자 뒤적이다가 노란상자 안에서 우연히 손때 묻은 호두 한 쌍을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아! 이 호두가 여기 있었구나.”

아버지께서는 50대 중반에 중풍을 앓으셨다. 반신불수가 되어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 걸으셨지만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신념만은 대단하셨다. 가끔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엉터리 한의사나 도사들에게 사기를 당하시기는 하셨지만 그래도 완쾌에 대한 믿음은 잃지 않으셨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버지께서는 마루에 앉아서 호두를 손에 넣고는 ‘도로록 도로록’ 굴리고 계셨다. “아버지! 웬 호두예요?” “점심 나절 동네를 한 바퀴 도는데 통장을 만났다. 그런데 통장이 이 호두를 주면서 손으로 굴리면 지압이 되어 피 순환도 잘되고 머리도 맑아진다고 하며 주더라. 호두 돌리는데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성의가 고마워 한 시간 돌렸더니 손에 힘이 나는 것 같다. 너도 한 번 굴려봐라”하시며 호두를 내미신다.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열심히 돌리셔야죠. 저야 아직 젊어서 그런 것 없어도 괜찮아요.”

어릴 적에 우리 집 뒤뜰에는 커다란 호두나무가 있었다. 동네 사람들 중에는 이 호두나무를 추자나무라고도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8월쯤 설익은 호두를 따다가 친구들과 개울에서 탁구공만한 외과피를 벗기던 일이다. 초록의 외과피를 벗기고 나면 더 단단한 껍질이 또 있는데 이것을 돌로 깨면 하얀 속살이 나온다. 그 호두의 맛이 얼마나 고소하던지… 대신 손은 호두물이 들어 한동안 지저분한 손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했다.

10월이 되면 아버지께서 호두나무로 올라가 긴 장대로 호두를 수확했는데 그 양이 그리 만치는 않았었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이웃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면서 “얼마 되지 않지만 내년 정월대보름에 부럼용으로 쓰세요”하셨다. 그리고는 남은 호두를 바구니에 넣어 천장에 달아 놓으셨다. 겨울 긴 밤에 공부를 할 때면 어머니께서는 천장에 달아 놓았던 호두며, 밤을 꺼내어 주전부리용으로 주시곤 하셨다.

오랫동안 만지지 않았는데도 호두는 맨질맨질하다. 나는 호두를 바지에 ‘쓱쓱’ 문지르고는 손안에 넣고 ‘도르륵 도르륵’ 굴려 보았다. 마치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호두는 명쾌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나는 딸아이가 부탁한 물건은 잊어버리고 호두를 굴리며 창고를 나왔다.

그날 저녁, 호두를 돌리고 있으려니 퇴근하고 온 아들이 묻는다. “아버지, 그게 뭐예요?” “호두다. 할아버지께서 사용하시던” “그래요? 저도 굴려보고 싶어요.” 아들은 호두를 손에 넣고는 소리를 음미하듯 조용히 굴린다. ‘도르륵 도르륵’ 아들이 호두를 굴리는 옆모습을 보다 나는 깜짝 놀랐다. 분명 아버지께서 호두를 굴리고 계셨기 때문이다. “거참, 아무것도 아닌데…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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