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철 아동문학가

시집간 딸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는 아내의 성화에 시간을 내어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신부수업커녕 시집가는 날까지 책과 컴퓨터를 끼고 살았으니 친정엄마는 늘 걱정이다. “아침밥은 먹었냐? 반찬은 뭘 해먹고?” 날마다 아침에 전화로 물어보고 지시하니 딸이 시집을 간 것인지 아내가 시집을 간 것인지 아리송하다. “여보, 시집을 보냈으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보고만 있어요. 요새 아이들은 똑똑해서 다 알아서 해요.”, “아이고 내 참, 내가 시간이 많아서 그러는 줄 알아요. 혹시 사돈이 흉을 볼까 그래요.”

지하철을 타니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없다.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살펴보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휴대폰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깜짝 놀란 엄마는 아이를 잡으며 제지하자 이번엔 울기 시작한다. 나는 얼른 일어나 아이를 안아 내 옆에 앉히니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를 지르며 박수까지 친다.  

다음 역에서 내리려 아이를 안고는 “아가야, 할아버지하고 같이 집에 갈까?”하니 말기를 알아듣는지 갑자기 엄마를 보며 운다. 나는 얼른 아이를 엄마에게 안기고 내렸다. 지하철역을 빠져 나오자 아내는 내 옆구리를 ‘툭’하고 친다. “당신은 할아버지가 그리도 좋아요. 아저씨라고 하지 왜 할아버지라고 해요.”, “그럼 당신은 지금 내가 할아버지가 아니고 아저씨란 말이요?”, “난, 당신이 할아버지 되는 것은 싫어요. 아직 얼굴이며, 건강상태로 보면 할아버지는 너무 일러요.”

아내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죽을 때까지 더 이상 늙지 말고 지금처럼 살기를 원하겠지만 주위를 보면 내 친구들은 모두 할아버지가 되었다. 모임에 가면 휴대폰에 손자 사진이며 동영상을 저장했다가 만나면 자랑하기 바쁘다. 오죽하면 앞으로 휴대폰으로 손자자랑하면 돈을 내고 자랑을 하라고 할까. 그래도 시간만 나면 손자자랑은 여전하다. 거기에 한술 더 뜨는 사람은 모임에 늦게 와서는 천연덕스럽게 손자 보느라 그랬으니 이해해 달란다. 그들은 요사이 아이들이 말하는 할빠(할아버지+아빠)들이다.

혼자 벌어 생활하기가 너무 벅찬지 젊은 사람은 대부분 맞벌이다. 그러니 손자 손녀를 보는 것은 당연히 할아버지 할머니의 몫이 된 것이다. 결혼한 자식들이 여건이 되면 손자들을 데리고 와서 맡기니 부모로서 거절도 못하고 힘들어 죽겠다고 푸념들이다.

“사실, 손자 보는 재미도 쏠쏠해.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는 먹고 사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지금 손자를 키우다보니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어. 이래서 우리 조상들이 3대가 한집에서 함께 살았나봐. 젊은이들은 열심히 돈 벌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자보고, 너도 좀 있어봐. 지금 나를 보며 웃지만 손자 생기면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할빠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보, 우리가 할빠 할마가 되려면 이럴 것이 아니라 육아에 대한 책도 사보고, 실습도 해야 되는 것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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