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디제라티 연구소장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는 백운경한 선사가 원나라에 유학중이던 1351년에 스승인 석옥청공 선사로부터 받은 ‘불조직지심체요절’을 바탕으로 20년 후인 1372년 75세 때 성불산에서 부처님 이하 7불(佛)과 중국 선사 및 우리나라의 대령선사 등 145가(家)의 선어(禪語)를 각종 문헌에서 가려 뽑은 것이다,  백운경한 선사는 ‘직지’를 어떤 기준을 두고 뽑았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경덕전등록’과 ‘선문염송’등의 선종 관련 사전류(史傳類)를 두루 읽고 여기서 핵심만 가려냈다. 이처럼 책을 읽으면서 내용을 가려 뽑아 옮겨 적는 것을 초서(抄書) 또는 초록(抄錄)이라 한다.   

이러한 초록 방식은 조선 후기 방대한 저작을 펴낸 실학자 중 한 분인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진다. 선생은 자식들에게도 책을 펴낼 것을 권유하며 그 비법을 전수했다. 어느 날 아들이 닭을 기른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냈는데 “책을 읽는 사람은 닭을 기르는데 있어서도 남다른 데가 있어야 하니 닭과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좋은 기술을 실제로 실행해 양계  전문책인 계경(鷄經)을 지어 보라. 이 책은 엮는 방법은 여러 책에서 닭에 관한 전문적 지식만을 가려 뽑아 차례로 모으면 되는 것으로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했다.        

이어 다산은 두 아들에게 가려 뽑는 기준을 제시했는데 “반드시 먼저 내 뜻을 정해 내 책의 규모와 목차를 세운 후에 뽑아내어야 일관된 묘미가 있으며, 저서의 목차를 구체화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직접 목차를 정해주기도 했다.

다산 못지 않게 독서를 좋아했던 임금으로는 같은 시대의 정조임금을 들 수 있다. 정조의 어록인 ‘일득록’에는 독서 자세, 독서와 토론, 독서기 쓰기 등 나름대로 체계화된 초록 독서법이 있다. 정조는 초록이 소모적이라는 신하의 말에 대해 “나는 책 보는 벽(癖)이 있는데 한 질을 다 읽을 때마다 초록해 둔 것이 있어 한가한 때에 때때로 펼쳐보는 것이 재미가 있다”고 답했듯이 초록은 정조만의 독서법이었다.

정조는 초록에 대해 “선현들도 모두 초집(抄集)에 힘을 기울였다”, “나는 평소에 책을 보면 반드시 초록하여 모았다”, “손수 써서 편집한 것이 수십 권이다”, “사실의 요점을 파악하고 문장의 정수를 모으는, 박문약례(博文約禮:지식을 넓게 가지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함)의 공부다”, “초록을 해야 오래도록 수용(受用)할 수 있다”라고 해 초록은 읽은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드는 적극적 독서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편집이나 비평을 거친 다음 저서로 펴냈다. 다만 초록에서 유의할 점은 취한 부분과 자신의 입론(立論)이 뒤섞이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이는 다산이 지적했던 것처럼, 오늘날엔 인용표기가 없으면 표절문제가 된다.

초록은 가려 뽑는 기준이 중요하다. 정조는 몇몇 선집에 대해 “취사 선택에 각각 권형(權衡, 저울)이 있었으니, 얕은 식견으로 함부로 논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했다. 위의 내용으로 추측하건데 다산과 정조는 이미 ‘직지’나 ‘사고전서촬요제요’와 같은 초록이 된 저술을 많이 보고 독서법과 저술법을 터득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직지’의 또 다른 이름이자 잘못 표현되었다는 ‘직지심경(直指心經)’은 경전으로서가 아닌 ‘직지’를 바로 읽는 경(經:지름길:방법), 다시 말하자면 직지 독서법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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