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지난 추석에 멀리 태안 사촌형님댁으로 명절을 보내러 갔다. 오랜만에 가족 나들이 겸 아버님을 모시고 동생내외랑 우리가족 총 8명이 이동했다. 중간에 휴게소도 들리면서 느긋하게 가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추석 전날에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필자의 둘째 딸 뿐이었다. 한복 입는 것을 좋아하는 탓에 번거로워도 굳이 입는다는 것이 기특했다.

형님 댁에 도착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TV에서 명절 때마다 하는 씨름대회가 펼쳐진다. 경량급인 태백장사라서 그런지 다양한 기술과 박진감 넘치는 모습에 오랜만에 흥미롭게 지켜봤다. 결승전을 마치고 감격해 하는 우승자에게 진행요원이 화려한 도포를 가져다주었다. 약간의 도움은 있었지만 태백장사에 오른 우승자가 직접 주섬주섬 입었다. 그리고는 바로 트로피와 상금을 건네주며 기념사진을 찍는 순서가 왔다.

시상자로 나선 사람은 그 지역의 국회의원과 무슨 체육협회 회장이었는데, 이들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시상자도 그렇지만 그들이 입고 나온 옷도 왠지 민속씨름대회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날의 주인공은 태백장사에 오른 이른바 ‘장사’인데 마치 시상자들의 홍보용 들러리 같았다. 이왕이면 씨름계에서 선수들로부터 존경받는 왕년의 ‘장사’들이 그들이 우승했을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와서 새롭게 ‘장사’가 된 우승자의 도포를 정성스레 입혀 준다면 어떨까? 아니면 일반 시상자라도 추석 명절이니 만큼 한복을 입고 나오면 어떨까? 필자가 보기에도 양복과 넥타이가 어울리지 않은데 외국인들의 눈에는 과연 씨름이 어떻게 비춰질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추석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는 걸까?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추석상을 차리고 절을 올리는데 둘째 딸과 셋째 아들만 한복을 입고 있었다. 전통과 문화를 생각하자는 필자 스스로도 편리함과 귀찮음으로 명절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옷은 중요하다. 가끔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한 청바지 차림으로 출근했다가 회의에 참석하게 되면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다. 연구원이라는 특성상 공무원들 보다는 자유롭게 입어도 이해하는 분위기 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인다. 결혼 초 아내가 골라주는 밝은 색상이나 화려한 옷을 입을 때는 어색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불편하던 것이 결혼 14년차가 되니 이제는 직장에서 제일 화려한 옷을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닌다. 가끔 동료들에게 핀잔을 듣기는 하지만 ‘나 스스로 만족하면 되지’라고 흘려듣는다. 옷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걸쳤던 나뭇잎처럼 부끄러운 곳을 가리는 수단이기도 하고, 진화론에서 이야기하는 생존을 위해 발전한 보호 장비이기도 하며, 나의 지위나 역할을 나타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어떤 목적이든 때와 장소, 활동영역에 따라 나에게 어울리는 옷은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도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 같다. 사전적 의미의 옷 뿐만 아니라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지역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누군가의 친구로서 어떠한 색깔과 모양의 옷을 입어야 할지 늘 고민이다. 입고 싶다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게 되면 부담되고 후회하게 되는 것 같다. 부족하지만,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족처럼 또는 친구처럼 편안하게 해주는 옷을 입을 때 심리적인 편안함이 오는 것 같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