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철 아동문학가

오늘도 찜통더위는 계속되고 있다. 아침부터 선풍기를 돌려보지만 그도 수명을 다했는지 아니면 더위를 먹었는지 연신 뜨거운 바람만 일으킨다. 생각다 못해 에어컨을 켜 보지만 전기료 폭탄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스위치에 다시 손이 간다. 거실의 온도는 TV속 리우올림픽 경기의 뜨거운 열기까지 합쳐지니 이래저래 천장 끝까지 올라간다.

금요일 저녁나절 소식도 없이 딸이 왔다. 지난주에 왔을 때 중국 출장이 있을 것이라는 언질을 주어 당연이 중국에 가 있을 줄 알았는데… 어째든 갑자기 나타나니 더 반갑다.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딸에게 묻는다. “중국 안 갔어?”, “예, 출장이 다음 주로 연기 되었어요”, “그럼 피곤한데 서울서 쉬지. 무엇하러 또 왔어”, “그냥, 우리 식구들이 보고 싶어서요.”

딸로부터 오랜만에 식구라는 말을 듣는다. 사실 나도 식구와 비슷한 말인 가족이라는 말보다는 식구라는 말이 더 정겹다. 왜냐하면 가족이라는 말 속에는 법률적인 구속감이 들기 때문이다. 아마 딸도 함께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잘 왔다. 얼마 안 있으면 다른 집 식구가 될 것이니 자주 와야지”, “아빠는 또 이상한 소리 하신다. 제가 어디 멀리 가나요. 그리고 제가 시집가는 것이 아니라 한 서방이 장가를 오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되잖아요”,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구나. 그럼 식구가 하나 늘었네. 허 허.”

세월이 흐르다 보니 식구의 개념도 이제는 많이 바뀐 것 같다. 애완견이나 동물을 식구로 보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부모님을 식구가 아닌 단순한 가족의 일원쯤으로 생각하는 가정도 있다. 며칠 전에 신문기사를 보고 분통을 터트린 일이 있다. 로또 40억 당첨된 아들이 어머니 몰래 이사를 가서 어머니와 식구들이 이곳저곳을 수소문을 하여 찾아갔더니 이번에는 아들이 어머니를 ‘주거침입’으로 신고를 하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하도 기가차서 시청 앞에서 “패륜아 000을 사회에 고발합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했다고 한다.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식구들끼리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 그뿐인가, 한집에 다섯 식구가 살았는데, 아버지가 숨진 지 보름이 지나서야 알았다고 한다. 그것도 집식구들에 의하여 발견된 것이 외부인에 의하여 발견 되었다고 하니 이 또한 기가 찰 노릇이다. 비록 아버지께서 식구들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았다고 해도 때가 되면 식사를 하셨을 테고, 혹 하시지 않으면 궁금해서라도 방문 정도는 열러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시신이 부패되어 벌레가 들끓고 이상한 냄새가 나도 관심 한번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내와 딸은 일요일 오후에 서울로 떠났다. 결혼식 준비로 엄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딸의 말에 아내는 덩달아 신이 났다. 사랑스러운 딸을 어떻게 시집을 보낼까 고민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내와 딸은 조금도 모르는 것 같다. “그래, 시집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위가 장가를 온다는 생각을 하자. 세상이 여성천하로 바뀌었는데 뭐.” 내 스스로 위로를 해 본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