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해피마인드 아동가족 상담센터 소장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인근 중학교에서 탑을 달렸던 아이들이 모인 학교였다. 교실 내 긴장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그 긴장감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문학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들 덕분이었다.

우리는 문학 동아리에서 만났지만 글을 쓰며 놀기 보다는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기행을 일삼았다. 시민회관으로 달려가 명사의 강연을 듣기도 했고 ‘회색노트’라는 이름으로 공동일기를 쓰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도 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는 각자 다른 지역으로 대학을 갔지만 만남은 지속되었다. 누군가를 좋아해서 뒤척임이 많아진 밤에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나를 배신했던 사람에 대한 분노도 친구들은 들어 주었고 내 곁에 있어주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들을 기르면서도 우리의 만남은 계속됐다. 다른 지방에 살았음에도 계절을 넘기지 않고 우리는 만났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간혹 빈정이 상하기도 했다. 승진을 앞둔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면서도 질투심에 사로잡혀 온 몸이 불타오르기도 했다. 내가 너무 작아 보여서 견디기 힘든 순간도 있었다. 서로의 말이 상처가 되어 낯빛을 붉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절이 바뀌면 우리는 누군가의 집에 모여서 못 만난 동안 쌓인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다. 무엇이 더 좋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이 더 멋진가를 생각하며 우리는 한 살 씩 나이를 먹었다.

삼 년 전, 다 자란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는 운주사로 여행을 갔다. 아이들을 보며 우리들은 감동했다. 우리들의 30년 역사에도 감동했다. 한 순간, 우리들을 위해 여행을 하자, 살아 보고 싶은 도시로 떠나자, 방심한 채로 열흘은 살아보자고 결정했다. 여행 경비는 200만원을 넘지 않는 선에서 떠나보자고. 우리들은 환호했다. 물론 간호사인 친구와 공무원인 친구는 열흘이란 시간을 빼기가 몹시 힘들었고, 나는 여행경비를 마련하는 일이 힘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파리로 떠났다. 17살이었던 우리가 ‘개선문’을 읽으며 상상했던 그 도시 그대로였다. 파리에서 우리는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파리에서 우리는 10일을 살았다. 아침에 숙소를 나서서 지하철과 버스를 타며 출근하는 파리지엥에 끼기도 했고, 저녁이면 장을 봐서 음식을 해먹기도 했다. 지하철 역사 부근 문구점에 들어가서 각자 좋아하는 문구를 사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색연필과 친구가 좋아하는 가위를 사고 아이처럼 환호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행복하다. 우리집 장식장에 놓인 청동빛 녹슨 작은 주전자는 벼룩시장에서 찾아낸 보물이다.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친구는 새벽부터 수영장을 찾아 동네를 헤매기도 하였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지불해야 했던 여행경비는 몇 달간 내 삶을 고단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설렘으로 다음 여행을 준비한다. 작년에는 프라하에서 열흘을 걷다가 왔다. 프라하 구시가지 골목길을 떠돌기도 했고 아침, 저녁으로 까를교를 거닐며 이국의 낯선 향기에 취하기도 했다. 낯섦이 익숙함으로 변할 즈음 우리는 돌아왔다. 곧 여행을 떠날 날이 다가온다. 이번에 살아볼 도시는 리스본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만난 그 리스본에서 또 열흘을 살아볼 참이다. 두 친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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