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정갈하고 따뜻한 느낌이 든다. 팔순이 한참 지난 어른과 그보다는 좀 적지만 역시 연로한 어른이 함께 사는 집안 풍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깔끔해 보인다. 방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자잘한 세간과 몇 권의 책, 일간신문이 있을 뿐인데 무엇이 이토록 안온하면서도 정겨운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일까.

작은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영한사전을 바라보며 ‘아직도 사전을 찾아보시느냐’고 묻는 내게 ‘신문이나 책을 읽다가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사전을 찾아보아야 직성이 풀리신단다.’ 하루 일과의 절반은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는데 보내신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서인가. 몇 년 전에 만났을 때보다 몸은 좀 야윈 듯해 보였으나 눈빛은 오히려 더 맑고 깊어진 듯하다. 집안에 꽃 한 송이 꽂혀있지 않건만 알 수 없는 향기가 느껴지는 것은 있는 힘을 다해 살았던 젊은 날의 삶을 온전히 내려놓고 나이 듦에 순응하며 내적인 풍요를 쌓아가는 그분들의 삶의 모습에서 풍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서로 보듬어주며 아름다운 노년을 살아가고 있는 이분들은 자매지간이며 내 고종사촌 시누님이다. 작은 시누이는 남편과 동갑인 칠십대 후반이고 큰 시누님은 그보다 꽤 연로한지라 거동이 자유로울 때 바깥나들이라도 한번 시켜드리고 소찬이라도 함께 나누고 싶어 벼르고 별러 찾아온 길이다.

두 분을 모시고 길을 나섰다. 달리는 차 창 밖으로 바람이 분다. 만추의 바람이다. 바람의 숨결을 따라 서럽도록 고운 잎들이 물결처럼 여울지며 떨어져 내린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있는데 큰 시누님의 한마디가 정적을 가른다.

‘동생도 몸이 성치 않은 걸로 아는데 어려운 걸음을 하셨네 그려. 사람 노릇을 하려고 예까지 오셨는가. 노릇을 제대로 하며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고맙네.’

노릇이라는 한 마디가 가슴에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노릇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삶의 과정에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 있나 그렇지 못한가를 가름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우주에 속한 만물 모두에게는 나면서부터 신에게서 부여받은 삶의 몫이 있고 이를 잘 감당해야 할 의무가 따른다. 길가에 흐드러진 들꽃들도 그냥 무심히 피었다 지지는 않는다. 그들이 나고 자라고 흙으로 돌아가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그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크고 작은 기쁨이 되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삶의 의미를 깨우쳐 주기도 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몫인지도 모른다. 무심한 듯 내리는 빗방울들도, 스치는 바람도 그들이 감당해야 할 소임이 있다. 혹한의 겨울을 보내고 새순을 밀어 올릴 준비를 하는 메마른 대지는 이른 봄에 내리는 빗방울들의 속살거리는 소리를 듣고 깨어난다. 때를 따라 내리는 크고 작은 빗방울들이 골짜기를 타고 흘러 냇물을 이루고 그들이 모여 강물이 되고 바다를 이룸으로 각각 처한 위치에서 생명 있는 것들이 살아갈 터전이 되어 준다. 그뿐인가. 홀씨들은 바람의 숨결을 따라 먼 곳까지 날아가 새로운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주에 속한 만물 모두가 나름대로 그들에게 주어진 몫을 감당하고 있기에 자연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

우리네 삶의 길목을 들여다본다. 그곳에는 나를 중심으로 하여 나의 부모, 자녀, 이웃, 직장동료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관계가 형성되며 나라고 하는 하나의 개체는 그 속을 헤엄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수많은 관계로 이루어진 드넓은 삶의 바다에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삶의 도리를 다하므로 자유롭게 유영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길을 잘못 들어 누군가와 부딪히는 바람에 서로 간에 상처를 입기도 하고 감당해야 할 소임을 다하지 못해 아픔을 주기도 한다. 삶의 바다에서 함께 공존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희생과 너와 내가 하나 되는 어울림을 필요로 한다.

노릇이라고 하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내가 발을 들여 놓고 있는 이곳 저곳에서 내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아직도 내 안에는 크고 작은 아집으로 가득하다.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내려놓지 못해서 빚어지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분별력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내가 보이기도 한다. 이만큼의 세월을 살았으면 내 모난 성품도 둥글어졌어야 할 텐데 그리되지 못함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산길에 있는 모난 돌이나 바닷가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몽돌이나 처음에는 모두 같은 돌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돌이 저토록 고운 몸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거친 파도에 부딪쳐가며 긴 세월을 살아내는 동안 깎이고 다듬어져 모난 것이 둥글어진 결과가 아니겠는가. 내 안의 모난 성품도 세월의 바람을 견디다보면 둥글어 질 수도 있으리라.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온통 쪽빛이다. 푸른 바다에는 하늬바람을 따라 고운 파도가 일고 석쇠 위에서는 왕소금을 뿌려 굽고 있는 전어에서 풍기는 맛난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오늘은 오랜만에 자리를 함께한 두 분 시누님과 더불어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올 정도로 맛나다는 가을 전어의 맛에 흠뻑 취해 보기도 하고, 이런 저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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