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숙 수필가

지저분하게 방치돼 있던 공터를 주민들에게 3평씩 선착순 무료 임대한다는 공고를 보고 주민센터로 전화를 했다. 다행히 몇 자리가 남아있어 신청을 하고 이름패를 받아왔다.

꽃밭의 이름은 내 닉네임을 딴 ‘플로리안’으로 정했다.

야채 종류를 심거나 농사를 짓는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절대 안 되고 꽃밭으로만 가꿔야한다는 조건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화원으로 달려가 이것저것 화려한 색깔의 꽃모종을 샀다. 내 꽃밭의 위치는 도로 쪽, 정 가운데 위치해 있어서 사람들 눈에 쉽게 띄는 곳이었다. 호미로 흙을 파헤치고 사 온 꽃 모종을 심었다. 꽤 여러 포기를 사왔다고 생각했는데 세평이란 면적은 꽃밭으론 작은 면적은 아니었다. 가뭄에 콩 나듯 여기 저기 듬성듬성 화초가 심겨진 꽃밭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내 어릴 적 집 마당 한 귀퉁이에는 언제나 꽃밭이 자리해 있었다. 굳이 해마다 새로운 꽃을 심지 않아도 다년생 화초들은 봄이 되면 어김없이 싹을 틔웠고 전 해에 떨어진 꽃씨들도 다투어 싹을 내어주었다.

자라면서 군데군데 빈곳이 보이면 아버지는 집 앞의 초등학교에서 모종을 얻어다 그 자리를 메웠다. 나는 그 옆에서 물뿌리개를 들고 시들어 고꾸라진 모종에 물주는 일을 담당했다.

납작한 돌로 둘레를 쌓아 마당과 경계를 지은 꽃밭에선 갖가지 꽃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차례로 꽃을 피웠다. 잠시 피고 만 봄꽃이 있는가 하면 봄부터 가을까지 줄곧 꽃을 피우고 가을엔 씨앗으로 여무는 꽃들도 있었다. 자그마한 꽃밭에서 꽃들이 서로 몸을 부딪히지 않고 자랄 수 있는 것은 키 순서대로 자리를 배치한 아버지의 정성 때문이었다. 키가 작은 채송화는 늘 앞자리였고 키가 큰 해바라기는 맨 뒷자리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담 너머로 나를 보고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도 키 큰 해바라기였다. 그 해바라기에는 보라색 나팔꽃이 줄기를 붙잡고 올라가 아침 마다 환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아버지가 헛간 처마 밑으로 매어놓은 새끼줄을 타고 올라간 보라색 나팔꽃은 지붕위에까지 넝쿨을 벋고 여름내 줄기차게 꽃을 피워댔다.

아파트 생활 30여 년 동안 나는 늘 아버지의 꽃밭을 그리워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내 집으로 결정할 때 가장 큰 부분으로 작용 했던 것도 베란다 끝 쪽으로 나 있는 화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연광이 아닌 베란다 유리를 투과해 들어오는 빛에 자랄 수 있는 꽃들은 제한돼 있었고 통풍도 문제였다.

봄이면 그득했던 베란다가 여름, 가을로 가면서 빈 화분이 늘어나기를 반복했지만 꽃밭을 지키고자 하는 욕심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직도 고향집에는 마당가에 커다란 꽃밭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화초보다는 철쭉, 장미, 유도화, 베롱나무 같은 꽃나무 들이 차지하고 있다. 아버지의 거친 손길이 머물렀을 가지마다엔 올 봄에도 화사한 꽃들이 자태를 뽐냈다.

화원의 하우스 안에서 여리게 자란 꽃이라 그런지 세평 꽃밭으로 옮겨진 화초들은 누렇게 떡잎이지고 사 올 때 올라와 있던 꽃대 말고는 더 이상 새 꽃을 피워주지 않았다.

아침 저녁으로 들러 물도 주고 풀도 뽑아주고 부엽토도 뿌려보고 영양제도 주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의 꽃밭에서 느낄 수 있었던, 탐스럽고 따뜻한 웃음이 지어지는 그러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꽃밭의 모습은 영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썰렁하고 인위적인 느낌만 들었다.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꽃밭에는 햇빛과 바람과 정성만이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 곳에는 가족간의 사랑과 웃음 그리고 담 넘어 이웃의 정까지 들어있던 것이었다.

도심 한 복판 공터에 조성된 세 평 꽃밭도 아마 이런 추억을 기억하는 어떤 이의 아이디어가 아닐까?

봄꽃이 허전하게 지나가고 씨앗을 뿌려둔 여름 꽃들이 제법 싹을 틔우고 있다. 지나다니는 주민들의 눈길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여름과 가을엔 세 평 꽃밭에도 아버지의 꽃밭에서 느꼈던 그런 따뜻함을 기대해 본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