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맑고 투명하다. 정제된 하얀 알갱이들이 햇살아래 빛난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산뜻하다. 손바닥에 놓고 비벼보니 바스스 부스러진다. 몇 알을 입에 넣어보니 후 입맛이 달다. 짠 맛이 단맛을 머금었다.

소금이 맛이 들었다. 소금에 섞여 있는 불순물들이 모두 사라지고 소금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맛이 더욱 깊어졌다. 짠맛에 쓴맛이 돌고 눅눅하던 것이 순도 100퍼센트의 잘 정제된 소금으로 다시 빚어진 것이다. 이는 오랜 시간을 햇살과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숱한 날들을 견뎌낸 뒤에 온 결과다. 소금도 숙성의 과정을 거치다보면 맛이 드는가보다.

요즘 들어 “시거든 떫지나 말지”란 말에 자주 부딪치곤 한다. 재능기부란 이름아래 작은 모임을 만들고 나서부터다. 오래 전부터 교우들의 권유가 있었지만 선뜻 응하지 못했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시작을 하게 되었다. 대단한 일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내가 아는 만큼을 지인들과 나누고 싶다는 작은 소망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세울만한 재능도 없으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시작을 한 것은 아닌가싶어 마음이 영 편치가 않다. 앎이 부족한 탓에 바른 길잡이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자괴감에 곤혹스럽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이대로 좋은가. 살구의 반열에 들지도 못하면서 떡 살구인체 하는 개살구 꼴은 아닌가, 불순물이 가득해 제 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 같은 모습은 아닌가 싶어서다.

농익어 제물에 떨어진 살구에서는 다디단 향기가 난다. 육질이 부드러워 한 입 베어 물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육질과 씨가 온전히 분리되어 먹고자 하는 이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잘 익어 제물에 떨어진 살구가 수북이 쌓인 나무 밑에는 농익은 살구에서 풍겨나는 단내를 맡고 몰려드는 꿀벌들로 가득하다. 모으려 하지 않아도 그에게서 풍겨나는 향기를 따라 스스로 몰려든다. 이는 살구 본래의 맛을 온전히 드러내어 제 몫을 다함이다.

순전한 맛으로 다시 빚어진 소금이라야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 녹아들어 맛을 완성할 수 있다. 단맛을 내는데 첨가하면 더욱 감칠맛 나는 단맛을 내고 신맛에 녹아들면 아주 맛깔스러운 신맛이 된다. 어느 곳에 들어가든 재료의 맛을 살려냄으로 제 몫을 온전히 감당한다. 간을 주관하는 소금이 제 맛을 낼 수 있을 때 음식은 비로소 맛의 절정에 이른다. 그래서인가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가에 버려져 뭇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람에게 있어 맛 듦이란 무엇인가. 춤을 추는 이들이나 연주를 하는 이들, 그림을 그리는 이들, 글을 쓰는 작가나 학문을 하는 이들, 그들 모두는 모진 고통을 견뎌내며 맛 듦의 과정을 거처 깊은 맛을 우려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꾼이 되고 장이가 된다. 춤을 추는 사람은 춤꾼이 되고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진정한 환쟁이가 되고 연주가들은 풍각쟁이가, 글을 쓰는 이들은 글쟁이가 된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을 화면을 통해 본적이 있다. 슈즈를 벗은 그의 발은 상처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발가락이 휘고 도드라진 것도 모자라 발가락 윗부분 마디마다 밖인 티눈을 보며 그의 일상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진정한 춤꾼이 되기 위해 여인의 고운 발이기를 포기한 훈장 같은 상처들은 안쓰러움을 지나 경이로웠다.

그는-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라는 글에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발레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당신이 나와 같은 하루를 보내기 전에는 나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대가 편안하게 길을 걸으며 풍경을 감상 할 때 나는 발가락으로 온 몸을 지탱하며 하루를 보냈다. 발레를 하기 위해 태어난 몸은 없다. 하루를 그냥 보내지 않는 치열함이 있을 뿐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늘 어딘가 아프고, 아프지 않은 날은 내가 연습을 게을리 했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그렇다. 어느 분야에서건 깊은 맛을 내는 경지에 이르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금이 단 맛을 포함한 맛깔스러운 맛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시간 따가운 햇살아래 제 몸을 내 맡긴 채 담금질을 당했기에 가능했다. 발레리나 ‘강수진’도 천상의 춤을 추는 춤꾼이 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기에 그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하물며 나 같은 필부이랴. 쓴맛과 눅눅함으로 제 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과 같은, ‘시거든 떫지나 말지’ 란 말이 딱 어울리는 개살구 같은 내가 그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농익은 모습으로 다시 빚어지기 위해서는 비움과 채움이 철저히 요구되는 맛 듦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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