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철 수필가
등산하기에 알맞은 날씨다. 어젯밤 비바람에 무심천 벚꽃이 모두 떨어지고 말았을 것 같다. 아침 이른 시각이어서 공기도 상큼하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산에 가는가?”
“네, 얼른 우암산 다녀와서 예식장 가려고요?”
대문을 막 벗어나려는데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이웃에 사는 신 통장 목소리다.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다. 신 통장은 이곳 토박이로 연세도 나보다 20년 정도 높고 통장을 수년째 맡은 사람이다. 또 있다. 마을에는 ‘청용회’라는 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의 회장이기도하다. 어느 날 신 통장이 출근하는 나를 불러 세웠다. 이 동네 사람이 되었으니 ‘청용회’에 가입하라는 거다. ‘청용회’에 가입하고 1년 정도 되었을 때 임원 개편이 있었다. 회장은 나이순으로 신 통장이 영구 회장이었고 다만 총무만 새로 뽑는 자리였다. 만장일치로 나에게 총무를 떠넘기는 거였다. 총무 맡은 모임이 다섯 곳이나 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총무를 맡은 인연으로 신 통장과 나는 연령 차이를 뛰어넘어 가끔 만나 술도 마시곤 한다.
신 통장을 뒤로하고 골목을 벗어나려는 순간 큰 길 쪽에서 올라오는 젊은이 두 명이 보였다. 손에는 캔 맥주가 들려있다. 눈이 충혈 돼 있어 밤새 술을 마신 듯 보였다. 한 명은 담배까지 피운다. 그들을 지나쳐 조금 갔을 때, 쨍그랑하는 소리가 강하게 들려왔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들, 저 깡통 당장 줍지 못해”
신 통장의 고함이 들려왔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 아저씨 웃기네. 재수 없게 식전 댓바람에 욕이야, 욕이?”
“뭐야? 이 녀석들”
“아니 뭐 이런 늙은이가 있어.”
젊은이 한 명이 신 통장의 얼굴을 가격하는 모습이 보였다. 발길을 돌려 후닥닥 뛰어 내려갔다. 신 통장이 비틀하고 넘어지는가 했더니 어느새 젊은이의 허리춤을 잡고 꼼짝달싹 못하게 제압한다. 그러자 젊은이는 발길로 신 통장을 걷어차려 하나 제대로 될 리 없다. 젊은이 중 한 명은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신 통장의 완력이 대단해보였다. 60이 넘은 연세에도 젊은이의 허리춤을 잡고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을 보면 젊어서 한 주먹 했다는 소리가 빈말이 아닌 것 같았다.
“너희들 이게 무슨 짓이야?”
“이 노인네가 먼저 시비를 거는데 어떻게 비켜가요?”
“박 총무 가만있게,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이거 놓으라고, 늙은이가 힘은 있어서…”
골목에서 고함이 들리자 아는 사람이 하나둘 뛰쳐나온다. 모두 우리 회원들이다. 힘으로 한다면야 젊은이 하나쯤이야 감당이 되겠지만, 무력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가 도착하고 정복 차림의 경찰관이 젊은이의 신상을 파악한 다음에야 신 통장은 허리춤을 놓아준다.
“어디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하마터면 큰 봉변을 당할 뻔했습니다. 어렵지만 지구대까지 가서 진술을 좀 해주셔야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젊은이와 신 통장을 태운 경찰차는 유유히 떠나가고 옆에 서 있던 젊은이는 어디로 도망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이웃 어른이 봉변을 당하고 지구대로 갔는데 무심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유리한 증언이 아니라 본 그대로 증언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지나가는 택시를 세우자 옆집 아저씨도 따라 탄다.
이름 : 강철수. 나이 : 23세. 직업 : 없음. ….
“강철수! 아무리 욕을 한다고 해도 할아버지 같은 분을 때린다는 것은 잘못한 것 아냐?”
그때 지구대 출입문을 밀고 다급하게 들어오는 50대 중반의 신사가 보였다. 젊은이의 아버지로 추측되었다. 조사를 받는 아들에게로 다가가던 남자가 신 통장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다음 순간 부동자세로 재빨리 돌변한다.
“해병!”
경례 소리가 지구대가 떠나갈 듯 우렁차다.
“해병! 쉬어”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건강하시지요?”
“그래. 이곳은 어쩐 일인가?”
“네! 제 자식이 이곳에 붙잡혀 왔습니다.”
순간 지구대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나는 이제 너 강철수는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강철수 보호자 되시는군요. 이리 좀 오세요.”
남자가 아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책상 근처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들이 저기 계신 어른을 폭행했습니다. 뒤에 계신 분들도 모두 보았다고 합니다.”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남자가 다시 신 통장에게로 다가온다.
“선배님!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제 자식 놈이지만 선배님을 폭행한 죄 그냥 두고 보진 않겠습니다.”
“허 허 허, 내 이 나이 먹도록 공짜 뺨 맞기는 처음일세. 경찰관님! 저놈 용서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정해진 법대로 처벌받게 해주십시오. 저놈은 지난달 제대한 해병입니다.”
“그래! 몇 기인가?”
“아들놈은 1027기입니다. 철수야 22기 왕 선배님께 인사 올려라.”
“해병!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해병은 어디 가서 맞고 오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젊은이 강철수가 신 통장을 향해 부동자세로 거수경례하자 신 통장도 빙그레 미소 지으며 인사를 받는다.
“해병! 쉬어”
돌아선 신 통장이 지구대장 책상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대장님! 우리 해병은 영원한 동지입니다. 저 후배 우리 해병대식으로 제가 교육하게 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조사하던 경찰관도 지구대장도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이윽고 지구대장이 경찰관들을 불러 모은다. 서로 눈웃음을 교환하는 것 같았다.
“피해자 영감님이 선처를 원하시기에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강철수 아무데서나 해병대 정신을 발휘하면 안 됩니다.”
“네, 주의하겠습니다.”
나는 지금껏 신 통장의 저런 모습을 처음 봤다. 그저 노인처럼 느릿느릿 걸어 다니기에 그런가 보다 했더니 오늘같이 꼿꼿한 자세, 우렁찬 기합, 절도 있는 행동들 모두 신기하기만 했다.
“1027기 강철수! 지구대 밖에서 쪼그려 뛰기 100번 하고 집까지 뛰어간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실시!”
“실시!”
지구대 마당에서 쪼그려 뛰기를 하는 강철수를 남겨두고 신 통장과 남자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인근 해장국집으로 향한다, 그 모습이 무척 정다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