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영 건양대학교 군사경찰대학 교수

4월 28일은 이순신 장군이 탄생한지 472년이 되는 날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날이 가면 갈수록 그의 삶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는 것을 어떤 이유에서 일까. 한 마디로 말하면 그는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그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정도를 걸으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한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일생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28세 때 처음으로 무과시험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부러진 다리를 묶고서는 다시 달렸다. 하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그로부터 4년 후인 32세가 되어서야 급제했다. 그 후 여러 지방을 돌며 무관으로서 주어진 직분에 충실했지만 권력에 줄을 대거나 상관에 아부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 때문에 승진도 느리고 공을 인정받기도 어려웠다. 오히려 부정을 요구해 오는 상관과의 마찰로 파면을 당하기도 하고, 자신의 허물을 이순신에게 덮어씌운 군관의 무고로 백의종군을 당하여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해야하는 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순신이 태어난 건천동에서 먼저 태어나 어릴 적부터 이순신의 됨됨이를 보아온 유성룡의 도움으로 죽음직전의 문턱에서 살아나게 되고 그의 강력한 추천으로 임진왜란 발발 몇달전에 관례적인 승진 단계를 뛰어넘어 파격적으로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게 된다.

언제 어느 자리에서든 자신의 임무와 역할에 충실했던 이순신은 부임과 동시에 수군을 정비하고 병영의 업무와 체계를 바로 세웠다. 특별한 전란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으나 병기의 점검과 군사의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함선의 건조에도 힘써 우연의 일치 치고는 너무나 극적으로 임진왜란 발발 이틀 전에 거북선을 완성했다. 

왕이 도움을 주기는커녕 죽이려고까지 했던 기막힌 상황 속에서 한 번도 충(忠)을 굽히지 않았다. 그를 모함하는 원균과 조정의 세력에 원망한 일이 없었으며, 자신이 정성을 다해 키운 수군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던 순간에도 원망과 격분으로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향한 한결 같은 마음으로 싸웠다.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은 매년 찾아온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순신 장군의 삶을 살짝 돌아보는 연례적인 행사로 보낼 수도 있지만 우리들은 그의 삶에 나타나 있는 진정한 삶의 모습과 우국충정의 정신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배워야 한다.

또한 본인이 분명 손해를 볼 줄 알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면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올바른 길올 선택한 장군의 참모습을 배울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이익과 출세를 위해서는 남을 속이기를 밥 먹듯이 하는 오늘날 세태에 이순신 장군의 삶의 모습은 우리들에게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사랑과 부하에 대한 따스함,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로움, 세상을 풍미할 줄 아는 문학적 소질 등 그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참으로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시고 떠나신 더없이 멋진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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