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천주교 박해 피해 모여든 ‘옹기점촌 조선가마터’ 보존방법 없나?(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봉산리)

▲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봉산리 무형문화재 제12호 박재환 옹기장의 200년 된 조선 전통 옹기가마.

곱고 차진 성질의 점토층 형성

구하기 쉬운 유약재료·부엽토

역사·환경·지리조건 어우러져

봉산리 옹기, 전국적으로 명성

주민 상생 위한 활용 방안 필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쌍청리 병천천 합수부에서 시작된 답사는 오송제2생명과학단지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오송읍 봉산리로 향했다.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모여들었던 신자들이 옹기를 구워 생계를 이어가며 신앙생활을 유지했던 옹기점촌이 충북도 개발공사가 추진하는 ‘개발’논리에 의해 곧 사라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합수부에서 궁평리 들을 거쳐 오송 신시가지로 진입한 후 밀집돼 있는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오송역사 뒤쪽으로 가면 오송읍 봉산리와 정중리 주민들이 살던 가옥과 산과 밭을 밀어버리는 개발공사가 한창이다. 붉은 황토 흙이 맨살을 드러낸 모습이 황량한데, 일부는 문화재관리청이 시굴조사를 한 흔적이 있어 마치 까마득한 선사시대 집터나 무덤이 되살아난 것 같은 분위기다.

모든 것을 다 밀어버린 개발현장 한쪽에 아직 허물리지 않은 채 간신히 버티고 있는 옹기가마터에서 7대째 전통옹기 제작을 전수받고 있는 박성일(53)씨를 만났다. 박씨는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박재환(83) 옹기장의 장남으로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아버지의 가업을 잇기 위해 옹기제작을 전수받고 있는 중이다. 현재 박재환 옹기장은 충북개발공사와 6년째 이어진 지루한 싸움으로 지친데다 노환이 겹쳐 옹기제작에는 손을 놓고 있는 중이다.

충북개발공사는 봉산리 일대를 2018년까지 택지개발을 완료한 후 아파트와 생명과학분야 업체 등에 분양할 계획이지만 현재 조선시대 전통 흙가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점촌 옹기가마터(봉산 4리)는 아파트 부지로 예정돼 있으나 아직 분양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특히 개발이 시작될 무렵인 2008년 봉산 4리 1만여평 부지에 대해서는 문화재지표조사가 누락돼 청주시민사회단체 및 박재환 옹기장은 문화재청에 시굴조사를 의뢰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때문에 개발공사는 이 지역에 대한 시굴조사가 완료돼야 택지분양 등 개발을 할 수 있게 됐다. 현재 박씨의 가족과 개발공사 측은 여러 가지 소송이 진행 중인데 최근 법원으로부터 행정대집행을 위한 강제철거 ‘집행정지명령’이 내려졌다. 덕분에 박씨 측은 옹기가마의 강제철거를 막을 수 있는 사회적 공론을 모을 수 있는 시간을 번 셈이다.

봉산 4리 옹기점촌마을은 조선시대 때 옹기장이들이 모여 살던 마을로 천주교 박해가 심하던 1866년 경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유입되면서 천주교 신앙촌이 되었다. 박재환 옹기장은 6대조 조부께서 조참판을 지낸 양반가문의 후손이지만 천주교 신앙을 갖게 돼 박해의 대상이 됐고 이곳 옹기점촌으로 몸을 피해 숨어살면서부터 후손들이 대대로 도공이 됐다.

옹기점촌마을에는 박씨 일가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옹기를 만들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점촌마을을 중심으로 신자들이 늘어나 1919년에는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공주 본당 벌미공소로 지정받았다. 벌미공소는 당시 세종시 전의면, 조치원, 옥산 등 청주 인근의 유일한 공소로 신자수가 3백명 가까웠다. 이렇게 번창하던 벌미공소 교우들은 선교를 위해 십시일반 해 1932년께 충북 괴산군 고마리 공소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벌미공소는 순교 없이 교우촌의 명맥을 유지한 곳으로 천주교 역사에 성지로서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의 순교자가 없다는 이유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봉산리 옹기점촌은 천주교 초대교회의 상징으로서 천주교역사에서도 재조명될 필요가 있는 유서 깊은 곳이지만 무엇보다 박해 이전부터 사용하던 조선 전통가마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예로부터 봉산리가 옹기마을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미호천 유역의 지각변동으로 인해 흙의 성질이 변해 점토가 형성돼 마을 곳곳 어디든 흙을 파면 옹기용 점토가 나왔다. 이 흙의 특징은 모래알갱이가 없고 곱고 차진 성질을 갖고 있어 점력이 좋아 질 좋은 옹기를 만들기에 제격이었다. 특히 질 좋은 천연 유약의 재료인 참나무와 소나무, 콩깍지 등을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었고 나무가 썩어 만들어진 부엽토를 쉽게 구해 사용할 수 있었던 점 등은 옹기제작에 있어 으뜸가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흙을 파낸 자리를 메울 수 없어 둠벙이 되었는데 1970년대 이후 경지정리가 이뤄질 때까지 마을에 수십 개의 둠벙이 있었던 이유다.

또 한 가지 봉산리 옹기점촌이 융성하게 된 데는 국토의 중심이라는 지리적요건의 충족도 한몫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봉산리와 가까운 조치원에 철도역사가 들어서면서 함흥, 청진까지 옹기를 쉽게 운반할 수 있었다. 질 좋은 봉산옹기를 전국 소비자들이 원했고 철도의 발달로 인해 옹기를 운반할 수 있었던 점은 봉산리 옹기가 전국으로 명성을 얻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처럼 봉산리는 옹기가 제작될 수밖에 없는 천혜의 환경과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이러한 옹기가마터가 개발이라는 논리에 밀려 사라진다는 것은 충북도를 넘어 국가적인 손실이다.

옹기장이 사용하던 가마는 오랜 세월 유지하는 동안 증축과 보수를 거쳤지만 조선시대 전통옹기가마의 형태적인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전통옹기가마는 흙바닥과의 경사도가 16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낮은 구릉지의 산이어야 한다. 현재 옹기장의 가마가 전형적인 전통가마의 형태를 유지하게 된 이유다. 이전해 전통가마 원형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같은 조건이 뒤따라야 한다. 일반 평지에서는 가마 제작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박씨는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전이 안 될 경우 현 장소가 전통가마터로 최적의 장소인 만큼 원형을 보존해 생명단지내의 공원으로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현재 아파트 부지로 예정돼 있는 옹기점촌마을을 설계 변경해 공원화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어차피 주민을 위한 공원이 필요한데, 천혜의 공원조건을 갖추고 있고 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곳을 활용한다면 충북도로서도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옹기가마 연구소 및 공원화로 생명단지 주민들과 상생할 수 있는 활용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굳이 무차별적으로 밀어버리려는 정책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박씨가 옹기가마터를 지키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다 허물어진 문화재도 발굴 조사를 통해 원형을 복원하는 것이 문화·역사 활용방안의 하나라면, 공적인 논의를 거치지 않은 문화유산에 대해 보존할 가치를 검증하지 않은 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대책 없이 허무는 것은 미래에 큰 우를 범하는 것이다.

봉산리 점촌마을 옹기장의 공방은 벌미공소 자리 였으며, 대대로 사용하던 재래식 물레와 모든 기구들이 남아 고스란히 사용되고 있다. 조선시대 전통가마의 양식이나 전통 옹기제작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다. 학술적인 연구 차원에서나,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10칸의 초대형 가마의 보존 가치 측면에서나 쉽게 허물어서 될 일이 아니다.

문화재청은 이곳 옹기가마와 가마터에 대해 2011년 7월 옹기장의 아들 박성일씨를 문화재지킴이로 위촉하면서 문화재로 선정한 바 있으며 2014년에는 제11회 한국내셔널트러스트보전대상 시민공모전에서 ‘꼭 지켜야 할 자연문화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국내외에서 한국전통 옹기가마의 보존가치를 입증해준 일이다.

가마터를 일단 허물고 보자는 충북의 행보는 지역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작은 역사문화 하나라도 더 찾기 위해 혈안이 된 타 지자체와 비교되는 일이다. 경남 울산의 경우도 옹기마을을 지역 문화재로 지정하고 옹기세계엑스포를 개최하는 등 지역의 특화사업으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충북은 있는 전통옹기가마도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 200년이라는 역사 가치를 개발논리에 의해 허물기 보다는 오히려 특화해 주민과 상생할 수 있는 활용방안을 찾아야 한다.

 (취재지원 미호천 지킴이 전숙자·강전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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