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디제라티 연구소장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를 초록한 백운경한의 행적은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백운에 대해 공식적으로 기록이 있는 48세 이전의 유년시절과 출가 후 행적은 사료의 부족으로 전무하다. 

그런데 최근에 백운이 충목왕 2년(1346) 충남 청양군 장곡사 약사여래좌상 조성의 발원문을 쓴 것으로 밝혀지면서 그의 50세 이전 행적이 일부나마 알려지게 되었다. 발원문에 의하면 그는 본격적으로 선수행을 하기 전에 교화활동에 주력하였고 국가가 시행한 기우제를 주관했던 만큼 기도의 영험함으로 큰 명성을 떨쳤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백운은 1346년 5월에 나라의 명을 받아 기우제를 주재하였으며, 발원문이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6년(1346) 7월과 6월의 날짜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볼 때, 백운은 개성이나 아니면 청양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바로 약사여래좌상 조성의 발원문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발원문 마지막에 친전사(親傳師) 백운(白雲)이라는 이름과 함께 수결(手決:싸인)이  있어 당시 승려 중 백운이라는 법호를 사용한 이들이 몇 명이기는 하지만 이 장경사에서도 기우제를 지냈다는 사실로서 직지를 편찬한 백운을 같은 인물로 보는 것이다.    

장곡사 발원문 내용에도 “가뭄이 들 때에는 단비를 내려 주시고”라는 표현으로 보아 당시에 7월까지도 전국에 걸쳐 가뭄이 해소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백운이 중앙무대로 나서게 된 것은 그의 유학 생활 이후로 보여지는데, 당시의 종교계를 이끌었던 태고나 나옹이 유학을 다녀 온 후 왕사 등을 엮임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물론 백운도 불교계를 대표해 승과인 공부선(工夫禪)을 주도하고, 나라의 부름을 받아  주요 사찰의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오랜 세월 머무르지는 않아 그의 선풍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백운이 50대 이전의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은 그의 무심무념(無心無念) 참 뜻을 펴려고 하였으나, 오늘날 박사학위가 없으면 인증이 되지 않듯이 자신의 선교활동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고 당시 트렌드였던 원나라 유학의 길을 나서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하여 유학생활을 끝내고 인도의 고승 지공선사에게도 인가를 받자 나라와 신도들이 점차 그를 인정해주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백운이 저서인 어록과 직지의 발문과 간기 등에 나와 있는 당대의 문인이나 사대부층 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장경사 발원문 조상 때와는 인적 네트워크가 훨씬 상승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중심 선풍인 간화선은 50대를 넘겨 태고보우의 영향을 받아 유학을 다녀온 이후 자리매김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운은 해주 신광사와 안국사에서 주지로 머물 때는 많은 이들과 교류를 나누었지만 장경사 발원문에서는 아쉽게도 직지 편찬에 도움을 준 묘덕 스님을 비롯하여 석찬이나 달잠 등의 제가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아 백운이 제자들을 거느린 것 또한 그이 생애에 있어 말년 무렵이 아닌가 추정된다. 

직지를 편찬한 백운에 관련된 행적은 직지가 금속활자로 탄생하게 된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다. 최근 금속활자본 진위 문제로 문화계가 혼란스러운 때 백운이나 직지와 관련된 사료의 발굴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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