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세종시 전의면, 전동면 산성 답사 마무리 일정으로 전동면 송성리 이성에서 출발해 작성(鵲城), 금이성을 거쳐 비암사로 내려서는 등마루 길을 종주하기로 했다.

전의현의 중앙에 있는 토성에서 바라보이는 서남쪽의 산성의 체계, 산세와 마을의 형성 과정, 축성 당시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의 역학관계도 짐작할 수 있어 의미가 깊을 것이다.

이성은 연기군 전의면 달전리에서 전동면 송성리에 걸친 이성산(해발 430m)에 있는 길이 714m, 높이 3~10m의 테메식 산성이다. 전의현의 향교 뒤에 있는 토성을 중심으로 남쪽에 위치해 주역에 따라 이성(離城)이라 한다는 설이 있다.

남산성이라고도 부르니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전의이씨 문중에서는 이곳을 시조 성지로 여긴다. 이성(離城)이 세월에 따라 이성(李城)으로 변개된 것이다.

송성리 임도를 조금 걸어 이성이라는 알림판을 보고 산성으로 올라갔다. 이도의 주거지라는 표지석이 있는데, 개국공신의 주거지로는 꽤 소박한 편이다. 벼슬까지 한 사람이 왜 이렇게 외지고 높은 곳에 와서 살았을까? 옛 사람들은 벼슬을 내놓고 검소하게 사는 것을 자랑으로 알았다는 것이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은 무너졌으나 돌무더기가 그대로 보여서 산성의 전체 윤곽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남쪽 건물지에서 옛 성의 모습을 살피기 위해 성벽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언뜻 축성법이 보인다. 주변의 토질로 보아 어디선가 돌을 옮겨온 것으로 보였다.

산성을 한 바퀴 돌아 남쪽으로 다시 나오니 남쪽으로 툭 튀어나온 부분을 발견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치성을 쌓은 것이라 생각됐다. 사방에서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좋고 멀리 유구, 공주로 향하는 도로를 전망하기에도 좋아 보였다. 치성처럼 보이는 이곳에서 많은 와편을 발견했다. 가만히 보니까 주변이 온통 와편이 널려 있었다. 큰 건물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와편은 큰 것도 있고 아주 작은 것도 있었다. 또 회색도 있고 붉은 색도 있다. 색깔이 여러가지인 것은 건축 시기가 다른 것이 무너져 섞인 것으로 보인다. 백제로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대로 보수하고 재건축도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들머리로 돌아와 성의 한가운데 높은 망대로 올라가 보았다. 여러가지 표지석이 있는데 주로 전의 이씨 시조인 이도의 사적에 관한 것이고, 가장 높은 곳은 정자가 있던 자리라는 표지석이 있었다. 높은 봉우리도 아닌데 이 자리에서 사방을 다 조망할 수 있었다. 전의에서 유구를 거쳐 공주로 통하는 주요 통로를 방어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고, 신라가 보은 회인 청주를 거쳐 이곳을 지나 서해로 나아가 중국으로 통하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요지이기도 하다.

산성은 아주 오랜 건축물이다. 그 시대와 역사 문화의 변화에 따라 보수하고 건물을 짓기도 하면서 때에 맞게 활용했을 것이다. 거기 묻어 있는 이야기도 조금씩 변용되고 굴절돼 전해진다. 이처럼 산성이라는 문화재에는 우리 역사는 물론이고 겨레의 삶의 모습이 층층이 겹겹이 묻어 있다. 이성을 내려와 작성으로 향하는 임도를 걸으며 많은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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