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남쪽바다에 숙이라는 신(神)이 있었고 북쪽바다에는 홀(忽)이라는 신이 있었다. 어느 때 숙과 홀이 세계의 중앙에 있는 혼돈(混沌)이라는 신(神)을 방문했다.

혼돈은 멍하니 아무런 응대가 없었고 얼굴의 생김새도 분명치가 않다. 손님을 반기는가 싫어하는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좌우간 머물게는 해 주었으므로 숙과 홀은 무엇인가 인사를 차리려고 타협한다.

“누구의 얼굴이나 두개의 귀, 두 개의 눈, 두 개의 콧구멍 그리고 한 개의 입이 있다. 이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소리를 듣고 세상을 보고 숨을 쉬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혼돈의 얼굴에서는 이 일곱 개의 구멍을 잘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들의 인사로 일곱 개의 구멍을 내어 얼굴을 분명히 해 주도록 하자.”

“음, 그게 좋겠구나!”

숙과 홀은 서둘러 작업을 시작했다. 첫째 날에는 하나의 귀를 만들고 둘째 날에는 또 하나의 귀, 사흘째는 하나의 눈, 나흘째는 또 하나의 눈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혼돈의 얼굴은 점차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이래 째에는 드디어 마지막 입이 생겼다.

“아, 얼마나 멋진 얼굴인가!”

“이 정도라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숙과 홀은 손을 마주잡고 즐거워했지만 혼돈은 침묵을 지킨 채 표정이 없다.

숙과 홀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혼돈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얼굴의 모습을 완전히 갖춘 혼돈은 이미 죽어 버렸던 것이다.

장자(莊子)의 우화(寓話)다. 우리는 여기에서 귀중한 교훈을 느낀다. 인간은 이 혼돈처럼 수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그 모순을 거부하고 무엇이든지 이론화해서 철두철미 완전무결하게 하려고만 하면 인간은 생존의 기초를 잃어버리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젊은 사람일수록 ‘행동의 이론화(行動의 理論化)’ 라든가 ‘언행의 일치’를 강조한다.

그러나 현실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지나친 이론이라든가 언행일치에 묶여 버리면 행동의 에네르기는 쇠약해지고 다이내믹한 행동력을 잃어 그 인생은 불구자가 되어 버리기 쉽다.

이를테면 집을 짓는다는 것은 자연의 경관(京觀)을 해치는 행위요 무엇인가를 박력 있게 추진한다는 것은 약간의 비리(非理)는 묵살해 버리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의 모든 생산적인 행동에는 어느 정도의 부정적인 요소가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적인 모순을 자각하고 그 모순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행동력은 생겨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론이나 ‘언행일치’에 너무 얽매어 철저하게 모순을 거부한다면 창백한 인텔리가 될 수밖에 없다.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고 협잡물을 마셔 보아야 비로소 인간은 터프(tough)하게 되고 행동 에네르기는 넘쳐흐르게 된다. 이래야만 스케일이 큰 인간으로 성장해 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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