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금이성은 세종시 전동면 송성리에 있는 백제의 성곽이다. 운주산남성, 금이산성이라고도 한다. 이름처럼 철옹성이라 천년 세월을 넘어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둘레 약 710m, 폭 4~5m, 높이 3m 테메식 석축산성으로 규모가 비교적 크다.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인 주류성으로 추정되는 성곽 중에 근처의 운주산성, 예산의 임존성, 서천 한산의 건지산성 다음으로 큰 산성이다.

금이성 가는 길은 전의면 다방리에 있는 비암사를 거쳐 가는 길이 편하다. 주차장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 언덕 위에서 아름다운 비암사를 내려다보면 자비처럼 햇살이 쏟아진다. 솔가리가 포근한 오솔길을 걸으며 쌓인 솔잎마다 담긴 옛 이야기를 헤아리노라면 절로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든다.

비암사에서 금이성 가는 길 4.3km는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순하다. 길은 지나간 사람의 발자국이다. 순한 길은 순한 사람의 흔적이다. 철옹성인 금이성을 지킨 사람들은 용감했겠지만, 마음은 순했기에 길도 순한 것이다. 길은 시대에 따라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지난 시대 사람의 발자국을 지우며 지나기도 한다. 순했던 길도 강한 사람에 의해 강하게 왜곡된다. 역사도 문화도 그렇게 강자의 발자국에 의해 바뀌는 것이다. 현대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이 산 기슭처럼 임도를 내고, 운주산성과 금이성의 이어진 지맥을 끊어 1번 국도를 내기도 했다. 끊어진 지맥을 잇듯 임도를 건너 비탈길을 오르니 금이성이다. 성안에는 잡목이 우거지고, 잡초가 무성하다. 무너진 곳도 있지만, 대부분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이렇게 원형이 잘 보존된 산성이 잡목에 묻혀 있는 것이 안타깝다. 성벽 위에 앉아 축성 모습을 살펴보았다. 외부는 돌을 조금씩 다듬어서 쌓았고 내부는 자연석을 그대로 박아 넣는 방식이었다. 축성에 쓰인 돌은 크기가 비슷한 직사각형이다. 문지(門址)가 남북으로 두 군데이고, 동쪽으로 수구(水口)도 보인다. 이 많은 돌을 어디서 어떻게 옮겨 왔을까? 동원된 백성 가운데는 장정도 있었겠지만, 노인도 부녀자도 어린 아이도 있었을 것이다.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다 돌에 치어 죽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성돌 하나가 근동 백성의 생명이다.

금이성은 백제가 고구려의 침범에 대비하고, 고려 때는 몽고군을 막았으며, 임진왜란때에는 왜구의 노략을 막는 전략적 요충지가 됐다고 한다. 특히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난 후 주변에 있는 운주산성과 더불어 도침, 흑치상지, 복신이 이끌던 부흥군의 전략적 근거지였다고 전해진다. 3년이나 버티다가 한을 품고 전멸한 부흥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연기지역 유민들이 세운 비암사가 인근에 있는 것으로 보아 마지막 항전지로 추정되기도 한다.

지팡이로 여기저기를 파헤치니 와편과 토기편이 보인다. 건물도 있었고 사람도 상주했었다는 증거다. 와편은 물고기 가시 같은 줄무늬가 있고 토기편은 민무늬에 갈색을 띤다. 토기편에서 옛 사람의 젓가락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체계적이고 학술적인 고증이 이루어진다면 금이성은 백제의 역사를 더 뚜렷하게 밝혀 줄 것이다. 묻혀버린 비운의 백제 역사를 이곳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암사 극락보전 아미타부처님께 삼배를 올리노라니 금이성 성돌 하나하나가 눈에 밟혔다. 오늘 세 시간 특별한 걸음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백제사에 대한 애착과 함께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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