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학창시절 의례 학교 행사 날에는 사진관을 운영하는 사진사들이 와서 사진을 찍었다.

일주일정도 지나면 그 사진들을 현상해 와서 각 반들을 돌며 우리들에게 사진 값을 받곤 했다. 중고등학교 때 기억을 되돌려 보면 아예 교정 안에 사진 찍는 아저씨들이 상주해 쉬는 시간에 수시로 우리들이 이용하곤 했다.

소풍이나 수학여행이 있으면 큰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맨 아저씨들이 보통 두 세 명은 우리 일행을 따라 나서곤 했다.

그러다보니 선생님들보다 전교생 이름을 그들이 더 많이 아는 경우도 있었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년 올라가기 전 그동안 반 아이들과 정이 들어 각자 헤어지는 기념으로 사진을 남겼다.

지금은 내 머리 속에 이름 기억도 없는 소녀들이 부산스레 머리들을 빗고 소위 깻잎머리로 최대한 몸들을 옆으로 각을 세워 상대방 등에 밀착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런 흑백 사진첩 속에는 지나간 세월의 흔적으로 변해간 개인의 생생한 역사가 있다. 어느 날 부턴가 흑백사진은 칼라사진으로 바뀌었다.

흑백사진이 흰색과 검은색 두 가지로 표현된 사진이라면 초창기 칼라사진은 어딘지 모르게 산뜻함이 없이 물감을 칠해 놓은 듯하다. 흑백사진이 주는 묘한 분위기는 칼라사진이 따라갈 수 없는 질감이 있다. 빛의 각도에 따라 음영이 달라지는 사진속의 사람들을 비현실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가끔 책장 속 정리를 하다가 지나간 사진첩을 꺼내 뒤적일 때가 있다.

그 속에서 내 어린날도 만나고 격랑 속 청춘의 시절도 만나지만 대개는 어색해서 몇 장 안 되는 식구들 사진으로 눈길을 돌릴 때가 더 많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젊은 돌아가신 아버지나 현재 오랜 병상 속에 있는 어머니의 젊음을 만날 때면 기분이 묘하다. 그 속에서 두 분은 여전히 젊음이 박제된 채 불멸의 푸름으로 있기 때문이다.

전후 가난한 살림살이와 여덟이나 되는 자식들 건사에 삶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지 가족들이 한군데 모여 찍은 변변한 사진하나 없다.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사는데 힘들었을 손위 형제나 나머지 형제도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살이 속에서 고군분투했으니 한가롭게 사진 찍을 마음의 여유를 못 냈을 것이다. 그 후 형편들이 나아져 집집마다 한두 대씩 카메라가 생긴 시절에는 이미 몇몇은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았고, 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난지 오래였다.

백세시대라 해도 내 아버지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니니 여전히 사진 속 아버지와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중년의 사내로 정지해 있다.

손 안에 컴퓨터가 들어가 있는 시대 속 스마트폰은 이제 전지전능한 세상의 해결사이다. 카메라 기능으로 사진도 수시로 찍었다 지웠다 할 수 있고, 실시간 SNS로 세상과 공유할 수도 있으니 여간 똘똘한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추억의 속도는 너무도 빠르게 내 곁을 스치며 지나간다. 아날로그적 인간인 나는 좋아라하고 할일만은 아니니 물끄러미 이 아이러니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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